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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Aug 15. 2020

보여 줄께

지켜만 보지 말고

다가와서 얘기해

바라만 본다면

넌 그저 그런 루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놀라운 밤

숨을 쉬는 1분 1초

매 순간을 all right


네가 원하던 리듬

네가 원하던 그 사운드

네가 원하던 파티

보여줄게 나만의 매력


………………



심야 라디오방송에서 DJ가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로 시를 읊조린다. 상황에 맞는 이야기까지 덧붙여 시를 음미한다. 그리고 제목을 말한다.


보.여.줄.께.


4인조 걸그룹의 노래 가사란다. 전혀 색다른 느낌이었다. 유튜브에 찾아보니 현란한 댄스풍의 노래로 조금 전 디제이가 읊은 시적 정서와는 정반대다. 멜로디를 벗긴 민낯의 모습이 이리도 다를까. 화장을 지운 여인의 민낯엔 기미가 보이겠지만 가락을 타지 않은 노래엔 그 의미만이 오롯이 남는다. 난 양념보다 생등심이 더 맛있더라.


임창정의 ‘내가 저지른 사랑’을 들으면 클라이맥스에서 저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같은 길이 같은 높이의 음들이 단순 반복되며 타악기처럼 귀청을 두드린다. 멜로디의 세련됨은 없지만 날것 그대로 짙은 호소력 있는 감성이 묻어난다.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

어느새 가득 차버린 내 사랑~~


후회인지 자책인지 주절거리며 몇 소절을 감미로운 멜로디에 흘려보내다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대목에선 멜로디를 훌훌 벗고 일정한 고음으로 외치 듯 쏟아내는 것이다. 마치 그 부분의 가사엔 밑줄 쫙~, 돼지꼬리 땡야~가 붙었을 것만 같다. 강조하려니 멜로디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는 건가.


문자가 없던 시절, 남한테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암기력이 필요했고 그 암기용량 내에 최대한의 메시지를 집약하려다 보니 산문이 축약돼 시가 되었고 이를 외우기 쉽도록 멜로디에 실어 암송하다 '노래'가 된 것인데 민낯 운운하며 멜로디를 과포장이라 떠벌였으니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제정신인가?


음식을 만들면서 점점 조리를 최소화하게 된다. 귀찮기도 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양념이 가리는 것 같아서도 그렇다. 삶고 볶고 지지고 튀기면서 혀끝의 절정을 향해 치닫지만 각 과정마다 고유의 영양소가 뭉텅이로 빠져나가고 파괴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젠 오이도 무치지 않고 고추장에 찍어 먹지도 않는다.


그냥 먹는다, 대신 눈을 감고... 수줍은 오이향이 살며시 입안을 맴돈다. 더 이상 혓바닥의 간사함에 놀아나고 싶지 않다. 맛은 그때뿐 재료의 영양성분만이 오래 남는다. 즉 씹는 순간, 맛은 허상이요 목에 넘긴 것만이 실체니 동굴의 그림자에 현혹되지 말아야... 까진 아니더라도 ‘간’의 주성분인 나트륨이 건강을 위협한단다. 그저 나이브하게 섭취, 날것 그대로 내 몸속으로 들어와 체화되길 바랄 뿐이다.


먹는 것부터 담백해지니 세상도 그러길 바랄 지도. 정치인들의 쇼에 화가 나고 광고판의 유혹에 정신없다.  밖에 나서면 주변 시선은  지갑에만 집중하는  같다. 아버님, 핸드폰 필름 갈아드릴게요. 맛있는 수박이 오천원 부터. 그리고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수많은 전단지들. 지하철에서 잠시 보는 유튜브에도 ‘뒷광고 광고 아닌   맘을 찔러 본다. 와우~ ‘트루먼  세트장이 따로 없다. 시청자들이 주목한다.  지갑이 열리나  열리나.


남사당패가 줄타기 하는 것도 아닌데 항상 경계를 밟고 있는 기분이다. 경계의 좌측은 순진무구지만 현실과 멀고 경계의 우측은 영특하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하긴 지갑을 여는 건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인데 누구를 탓하랴. 조금 더 팔고자, 조금 더 알리고자 조금 더 높아지고자 꿈을 향해 노력하는 것일 뿐인데. 그래도 영업의 생활화~ 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남의 이목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닐는지. DJ가 읊었던 싯구는 솔직함을 말하는 것 같다.


누가 봐도 궁금하지

너도 내가 생각날 거야

커져만 가는

부풀어가는

숨기지 말고 보여줘


지혜wise가 영특함clever에 밀리고 품격elegant이 세련됨sophisticated에 뒤처지는 게 아쉽다. 세상 살면서 이것저것 다 필요한 것들인데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요즘이다. 숨기지 말고 보여준다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으련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니 균형이 무너진다. 팽팽했던 줄이 흔들린다. 경계의 미학이 사라지고 있다.


내가 저지른 사랑/ 임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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