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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이 Sep 03. 2023

외할아버지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다가


박완서의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야성의 시기] 챕터를 읽다 보면 나의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의 생활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수몰되어 사라졌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서로와 그 가족들을 알고 6.25 전쟁이 난 줄도 몰랐을 정도로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던 전북 진안의 작은 마을이다.


외가는 식구들이 많았다.

상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 아래로 6남매 그리고 옆집에는 작은 외할아버지 식구들도 살았다. 그러다 보니 명절날 사촌들까지 모이면 꽤 시끌벅적해 지곤 했다.


비슷한 또래의 사촌들이라 종종 싸우기도 했지만

사이가 좋을 때는 산과 들과 강에 몰려다니며 물고기를 잡거나 아궁이에 불을 잔뜩 때서 방바닥을 타게 만들기도 하고

작은 외할아버지 댁의 염소에게 배가 터질 때까지 종이를 먹이며 깔깔대다가 혼나기도 했다.

이렇듯 외갓집을 떠올리면

온통 부산스럽게 즐거운 기억뿐이다.


하지만 그중 가장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자면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던 그날이 생각난다.


어느 날엔가 우리 가족만 외갓집에 있었던 날이다.

한창 그림 그리기에 빠져 있었던 나는

굳이 집에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들고 갔다.

상할머니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주무셨던 안방은

다른 사랑채나 창고에 비해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곳 마루에 외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나는 별다른 말없이 스케치북을 꺼내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께서 작은 술상을 막걸리와 함께 내오셨다.


그때의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림 그리는 솜씨가 대단하지 않아서 늘 같은 풍경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

보이지도 않는 산을 꼭 양쪽에 두 개 그려 넣고

그 사이에는 동그란 해를 붉게 그렸다.

해가 뜨는 그림인지 지는 그림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그림을 한창 그리다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막걸리 잔을 들고 싱긋 웃으셨다.

시원한 바람이 내 밋밋한 얼굴을 부드럽게 스쳐가는 동안

나는 외할아버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내 볼은 이내 그림 속 해처럼 살짝 붉어졌다.

고개를 스케치북에 파묻고 외할아버지가 그림을 보지 못하도록 몸을 틀었다.


-아삭 수박을 베어 무는 소리

-스윽스윽 온통 초록색으로 산을 색칠하는 크레파스 소리

-꿀떡꿀떡 막걸리가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

-후후 크레파스 가루를 입으로 불어내는 소리.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곤 갑자기 3인칭 시점으로

어스름 깔린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나와 외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떠오른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다.

근래의 일도 잘 기억 못 하는 나인지라

초등학생 때의 자잘한 일들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이날의 느낌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린 시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를 꼽아보라고 할 때

왜인지 나는 늘 그날을 떠올린다.  


종종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 꿈에 외할아버지가 나오신다고 했다.

몇 년 전 엄마 모르게 자전거를 사서 여행을 준비하던 중

크게 넘어져 다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신기하게도 엄마 꿈에서 내가 자전거를 타는 자세로 계단에서 떨어지고 있는 걸 외할아버지가 밑에서 받아주셨다고 했다.

“이런 꿈을 꿨는데, 너 별일 없지?”라며 걸려온 전화에

소름이 돋았었다.


사후 세계도 귀신도 믿지 않는 나지만

그 이후론 큰일이나 피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외할아버지께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그 소원이 모두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 1년 반의 세계 일주를 했을 때도 큰일 없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에 막내 손녀에 대한 외할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은 들어가 있지 않을까 때때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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