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을 서울에서 시작하였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지만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이 나를 한껏 들뜨게 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만의 방, 나만의 장소. 나만의 휴식. 혼자라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내 방이 없어서 불편한 적도 없었고 내 방을 만들 필요도 느끼지 않았지만, 대학을 졸업할 즈음엔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부모의 관심과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멀어지고 싶었다.
그다지 좋은 직장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이기에 좋았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도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 상관없었고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도 괜찮았다. 나는 젊고 힘이 있으니까. 그들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니까.
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집으로. 반복되는 하루들. 혼자라서 좋아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밥은 대충, 저녁은 떡볶이, 라면, 짜장, 순대 등 시장에서 파는 손쉬운 것으로 해결을 했다. 먹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까. 끼니때가 되어 허기만 채우면 되니까.
첫 직장은 그냥 첫 직장이라는 것 외에 다른 매력은 없었다.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권하고 설득하는 건 나와는 별로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달리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대안이 서지를 않았기에 당장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일에 대한 회의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사는 게 무겁게 느껴졌다.
텔레마케터란 특성상 전화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일의 성과는 내야 하고, 내 실적은 형편없었다. 몇몇 동료들과 야근했다.
그러다 내 또래의 한 남자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일 얘기로 시작되었지만, 저녁이라는 시간이 주는 오묘함에 빠져 우리는 사적인 대화로 새어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이가 같아서 친구 하자고 했지만 금방 만남을 정하지는 않았다. 전화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보통의 남자들은 전화로 얘기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철수는 그렇지 않았다. 남자지만 섬세한 면도 있었고 내 얘기를 잘 들어주었다. 사무실에서 통화를 하고 저녁이 되면 집에서 통화를 했다.
그렇게 근 한 달 반이 되어갈 즈음 우리는 만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여 돌아설까 봐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실제로 만나니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철수는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남자는 아니었다. 아니, 나는 이상적인 남자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보통의 키에 얼굴은 큰 편이었다. 피부도 여드름이 아직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약간 퉁퉁한 스타일이었다. 뚱뚱한 게 아니라 퉁퉁한 스타일. 내가 사귀었던 남자들은 대부분 잘생겼었는데 철이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친구이기에 외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얼마나 알아주고 이해해 주느냐가 제일 중요했다. 그 당시에 나는 엄청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혼자를 꿈꾸었고 낯선 곳을 원했지만 혼자서 적응하며 지내는 게 만만치 않았으니까. 한참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때 철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내 빈 공간을 찾아와 여기저기 잘 메워 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공간을 야금야금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로 나를 많이 놀라게 했다. 첫 만난 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왜 이러느냐고 하고 싶었지만, 너무 촌스러워 보일까 봐 참았다. 그의 손은 두툼하니 컸다. 따뜻이 감싸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는 신체적인 접촉을 자주 했고 아주 자연스럽게 했다. 길로 다닐 때는 항상 나를 안쪽으로 서게 했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은 특별했다. 큰 것은 아니지만 정성이 담긴 선물을 가끔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주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도 녹음해 주었다. 테이프에 녹음하는 일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라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인내심이 부족한 나로서는 뜻깊은 선물이었다.
퇴근 후에 만나 저녁을 먹고 술을 먹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났다. 주말에는 영화도 함께 보았다. 편한 친구에서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어느새 연인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인천 월미도 가 봤어?”
“아니.”
“그럼 내일 갈래?”
“내일? … 얼마나 걸리는데?”
서울을 벗어나 어디론가 간 적은 거의 없었던 일이라 약간 흥분도 되고 기대도 되었다.
“넉넉하게 잡아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리지 않을까.”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우리는 지하철을 탔다. 월미도는 작았지만, 놀이시설도 있고 바닷가가 있어서 운치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학생들이나 젊은 연인이 많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축제 같은 분위기가 나를 설레게 했다. 인형 맞추기 게임을 하고 신나게 두드리는 두더지 게임도 했다. 연예인이 운영한다는 카페에서 돈가스를 느긋하게 먹고 커피를 마셨다.
내일이 없을 것 같은 오늘이 좋았다. 밤의 분위기에 흠씬 취했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분위기에 빠졌다. 바이킹이랑 디스코 팡팡은 탈 수가 없었다. 바이킹은 중학교 2학년 때 타 보긴 했었지만 무서워서 두 번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디스코 팡팡은 어지러울 것 같아 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타는 모습은 재미있어 보였다. 철이는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바닷가 주변을 산책했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공간과 시간을 잃어버린 듯 낭만적이었다.
먹고 놀다 보니 어느덧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간에 맞추어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 없기에 막차 시간을 물었다.
“막차? 벌써 끝났는데-.”
철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뭐? 끝났다고? 그럼 우린 어떻게 갈려고?”
“오늘 주말인데 꼭 집에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뭐? 어제는 그런 말 안 했잖아.”
나는 그를 보았다. 저 말의 의미는 뭐지?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서울에서 인천까지는 가까운 거리이다. 나는 밖에서 자기 위한 그 어떤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나? 버스는 있을까? 지하철이 없는데 버스라고 있을까?
나와 그는 밤을 함께 지새울 정도의 사이인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찌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그는 태연해 보였다. 나는 한 번 더 확인했다.
“정말 가는 차편이 없는 거야?”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당황한 내 표정을 보았는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양념 곰장어와 맥주를 마셨다. 먹으면서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현재의 나는 미성년자가 아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서울로 왔다.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하루 집에 가지 않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밖에서 잔다고 큰일이 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12시가 넘길 즈음 우리는 모텔로 갔다. 이상하고 불편했지만, 별수 없었다. 방에 들어가니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야 할지 서 있는 게 좋을지 감이 서질 않았다. 그는 나보고 씻으라고 했다. 나는 양말을 벗고 손과 발만 씻었다. 어색했다. 방 안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가 씻고 나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모텔에서 자는 거 처음이야?”
“어? 아니. 수학여행 때.”
어색하고 이상하여 괜히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따뜻한 방 안의 공기와 술기운으로 몸에 피곤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갑자기 그의 손이 어깨에 닿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뭐 하는 거야?”
“어? 앉아서 자지 말고 편하게 누워서 자라고.”
그의 목소리에도 약간의 떨림이 있었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 쉬었다. 가능한 한 천천히, 가능한 한 차갑게 말했다.
“ …… 잘 들어. 나는 널 좋아해. …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아. 아직은. 날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오기는 했지만, 너랑 잘 생각은 없어. 엉뚱한 생각이랑 접어.”
멍한 얼굴로 나를 보는 그를 내버려 두고 나는 옷을 입은 채로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도 나를 좋아하기에 한편으로는 자신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나는 일부러 돌아누웠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아무하고 아무렇지 않게 얼렁뚱땅하고 싶지는 않았다. 촌스러운 일이었지만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을 나눌 수는 없었다.
잠을 자기는 했지만 하나도 자지 않은 것처럼 몹시 피곤했다. 아침 첫차로 우리는 올라왔다. 그는 잘 가라는 말만 남기고 먼저 내렸다. 그는 뭔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뭘 잘못했지?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연애 초보가 아니다. 대학 때 미팅, 소개팅으로 만나 몇 달 사귄 애도 있었고 같은 과 선배랑도 몇 명 사귀었다. 짝사랑도 했었고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사귄 적도 있었다. 꽤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짐을 했었다. 근데 그 누구와도 손을 잡는다거나 키스를 한 적은 없었다. 아니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없었다. 그냥 만나서 얘기하고 영화 보고 저녁 먹고 가까운 산에 등산을 가는 게 다였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만나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내 마음을 다 쏟아부을 정도로 열렬한 사랑은 없었다. 아, 있었다. 그 선배. 나보다 5살이나 많은 선배. 과 동아리에서 만났다. 선배는 키가 크고 몸집도 좋았다. 얼굴에 구레나룻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는데 어찌나 징그럽던지 꼴 보기 싫었는데, 세상에 선배의 구레나룻은 엄청나게 멋지고 섹시해 보였다. 선배는 1학년인 내가 귀엽다며 장난을 자주 쳤다. 동아리에 갈 적에는 어떻게든 예쁘게 보이려고 거울을 얼마나 자주 들여다보았는지 모른다. 내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선배의 목소리는 멋졌다. 목소리만 듣고 있어도 힘든 줄을 모를 것 같았다. 선배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내 나름대로 선배에게 여자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선배에게는 이미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당시의 내 유일한 소원은 단 하나였다.
학교 축제 뒤풀이 때 선배랑 블루스를 추는 것이었다. 넓고 따뜻한 선배의 품에 한 번만이라도 안겨 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선배는 축제 마지막까지 오지 않았다. 선배가 없는 뒤풀이는 별 의미가 없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선배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왔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내 첫사랑은 그렇게 떠나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그의 연락은 없었다. 나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불편하고 힘든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면서 일에 쏟아부었다. 덕분에 실적이 꽤 올랐다. 하루에 두세 번씩 오던 전화가 오지 않으니까 동료들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싸웠다고만 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그가 그립기는 했다.
또다시 찾아온 주말. 빵을 사고 라면을 사고 술을 사고 비디오 세 편을 빌렸다. 혼자서 영화에 빠져 보면 영화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섬세한 것들을 볼 수 있고 몰입도가 훨씬 좋다. 맛있는 것과 적당한 알코올은 감정을 더 자극시켜 훨씬 재미있다. 비디오를 보면서 울고 웃는다. 새벽 3시쯤 되면 비디오로 눈도 피로하고 체력도 떨어지면서 잠이 온다. 눈을 뜨면 아침 10시쯤 된다. 물을 마시고 다시 뒹굴뒹굴하다가 다시 잠이 들기도 하고 배가 고파서 냉장고를 뒤지기도 한다. 늦잠을 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 4시. 따분한 시간이다. 뭘 하기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어중간한 시간이다. 비디오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비디오를 반납하고 동네를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거의 6개월이 되어 가지만 동네 구석구석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일요일의 산책. 집에서 나와 뒤쪽 골목길을 중심으로 걸었다. 지대가 약간 높은 곳이라 멋지고 반듯한 새 건물보다는 낡고 허름한 주택이 많았다. 내가 사는 곳도 기존의 주택을 리모델링해서 전세로 내 준 것이다. 내가 사는 방이 마음에 든 것은 넓은 방과 넓은 화장실 때문이다. 집과 집 사이의 골목으로 다니면서 동네를 구경했다. 내가 사는 곳보다 더 높은 곳도 있었고 꽤 좋아 보이는 집도 있었다. 깨끗하게 세워진 담장과 넓은 마당이 보였다. 이 동네에 이런 집이 있다니. 골목을 다니면서 하는 산책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간간이 개들이 심하게 짖어서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서울도 다른 도시 못지않게 낡고 허름하다는 것을 느꼈다.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집들을 살피다가 어느 순간 나는 단지 걷고만 있었다. 걸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제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기분이 가라앉았고 내가 가진 고민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날 즈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리가 자주 만났던 카페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그는 내게 장미와 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뜻밖의 선물이라 놀라웠고 기분이 좋았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 1년이 되어갈 즈음의 내 생일날이었다. 그를 내 자취방으로 초대했다. 싸기는 하지만 달콤한 포도주 한 병과 안주를 준비하여 우리는 내 생일을 즐겼다. 포도주를 마시며 비디오를 보았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였다. 남편은 다정다감했고 부인은 아름다웠다. 남편은 정리결벽증과 의처증이 아주 심한 사람이었다. 아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보인 날이면 어김없이 폭력이 가해졌다. 화를 내면서 하는 폭력이 아니라 웃으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날리는 폭력은 훨씬 더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웠다. 아내는 남편의 실체를 파악하고 탈출을 결심한다. 남편은 폭력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를 탐할 때도 선정적이면서 비정상적이었다.
술을 마시던 그의 손이 내 어깨에 올려졌다. 비디오의 내용도 신경 쓰였고 그의 손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느낌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철이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한순간 아득했다. 알코올이 나를 취하게 만들었는지 비디오가 그렇게 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처음으로 나를 허락하게 한 남자. 그 남자를 받아들인 내 느낌. 손길도 부드러웠고 키스도 달콤했다. 그가 내 몸으로 들어올 때는 낯설고 겁이 나기는 했지만 나른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자연스럽게 밤을 요구했다. 전화 통화하다가 그냥 보고 싶다고 하면 시간에 상관없이 달려왔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는 것과 그가 원하는 게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만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이 주는 쾌락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물론 피임기구는 그가 준비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떤 날은 그냥 하기도 했었다. 그는 욕망이 강한 남자였다. 요구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임신에 대한 걱정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체외 수정을 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가 만난 지 꽤 시간이 흐를 즈음 생리가 나오지 않았다. 약국에서 테스트기를 사서 확인을 했다. 임신이었다. 당황스럽고 놀랍고 두려웠다. 임신한 사실을 말해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임신한 사실을 알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그와 몸을 섞으면서 임신에 대한 방책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게 원망스러웠다. 그가 처음이었기에 정말로 그다음에 대한 어떠한 것에도 생각이 없었다. 임신한 사실을 알리면 그가 병원에 갈 비용을 줄까? 아니었다. 그는 아직 학생이었고 집도 넉넉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는 하루 병가를 내고 병원에 갔다. 수술은 간단히 끝이 났다. 회복실에 누워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갈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서로 좋아서 관계를 가졌지만 책임감 없이 저질렀기에 기분이 더러웠다. 내 몸이 망가지는 것도 싫었다. 그와 헤어질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대로 만나도 될지는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의 전화가 왔다. 아파서 집에서 쉰다고 했더니 걱정스러운 말을 하였다.
“원인이 바로 너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오늘은 그냥 좀 쉬고 다음에 보자.”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거기서 멈추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의 실수는 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이제 서로를 알아가고 좋아하는 감정이 많이 자라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의 욕망은 강했다. 나도 그에 의해서 성에 대해 눈을 뜨고 있었기에 중독처럼 빠져들었다. 우리는 찰떡궁합처럼 잘 맞았다. 그가 하는 키스는 달콤했고, 그가 하는 애무는 날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나를 흥분하게 해 놓고, 자신을 흥분시키길 원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어느 정도 달아오르면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체형을 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기엔 나는 힘이 부족했다. 내가 지칠 때 즈음 그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밤을 보냈다. 즐거움이 나를 중독시키고 있었다. 육체적인 관계를 시작한 이후, 우리는 대부분을 내 방에서 보냈다. 평일에도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시간에 상관없이 달려왔고, 주말이 되면 영화 대신 비디오를 보면서 방에서 뒹굴었다. 그는 이상하게 피임기구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내 생리주기는 일정했기에 최대한 주의를 했다. 그러나 조심을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또 임신이 되었을 때는 화가 났다. 더 주의하지 않은 나에게 화가 났고 욕망에 넘어간 나에게 화가 났다. 물론 그도 미웠다.
이번엔 고민하지 않고 임신 사실을 알렸다. 그는 말이 없었다. 자신이 조심하지 못해서 그렇다며 미안해했다. 나는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했다. 그는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병원 얘기도, 돈 얘기도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다시 병원에 가서 수술받아야 하는 사실이 참으로 싫었고 참담했다. 임신한 사실이 거짓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입덧이 시작되었다. 속은 계속해서 매스꺼웠다. 물을 마시고 토하고 조금 진정이 되었다가 다시 토하기를 반복했다. 회사에 앉아서 일할 수가 없었다. 냄새란 냄새는 모두 내 코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며칠을 먹지 못하고 토하기만 했더니 힘들었다. 병원에 가야 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갔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내가 바보처럼 보였다. 세상에 나보다 더한 바보는 없어 보였다. 수술을 하고 집에 왔다. 펑펑 울었다. 여자인 내가 미웠다. 내 몸을 함부로 대한 내가 싫었다. 욕망에 사로잡혀 그를 받아들인 내가 한심해 보였다. 울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집으로 오는 어떠한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전화기 소리가 짜증을 불렀다. 걱정한다고 전화를 했겠지. 위로라도 해 주고 싶겠지. 위로한다고 내 몸의 변화를 없앨 수도 없고 있던 일이 없던 일로 되는 것도 아니잖은가. 전화기는 계속 울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우리의 만남이 계속 이대로라면 답이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당분간은 만나지 말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주말을 잠으로 보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는 못했지만 잠만으로도 내 기분은 좋아졌다.
월요일이 되었다. 주말이 지난 하루일 뿐인데 내게는 다른 새로운 세상처럼 보였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니 새로운 마음과 행동이 필요했다. 그에게서 오는 전화는 피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오지 않았다. 퇴근하면서 동료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갔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누군가 있었다. 그였다.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을 알려 준 것이 후회되었다.
“왜 여기 있는데?”
나는 무심한 듯 물었다.
“……”
말이 없는 그를 보고 있으니 다시 화가 올라왔다.
“가자. 근처에서 맥주나 한잔하자.”
그러면서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조용히 따라왔다. 호프집에서 감자튀김을 시키고 생맥주 두 잔을 시켰다. 우리는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건데?”
걱정스러운 듯 말하는 그가 가증스럽게 보였다. 가능하다면 한 대 치고 싶었다.
“……”
나는 그와 앉아 있는 자리가 불편했다. 할 말도 없었다. 그도 어쩌면 그럴 것이다. 우리 둘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나 ……많이 밉지?”
당연한 말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밉다고 말하면 그걸로 죄가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를 지었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죄를 지었으니 일정 부분 감당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미안한데… 당분간 우리 연락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내 말에 그는 놀라는 듯했다.
“이번 일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네. 이해해. 나도 반성하고 있어. …… 그래도 연락은 하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 그러나 연락은 하자.”
그는 달래듯이 간절하게 말했다.
“그래. 연락하고 싶으면 해. 나는 받지 않을 테니까. 전화받지 않는다고 오늘처럼 집으로 찾아오는 것은 하지 말고. 나는 당분간 너랑 어떠한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너 책임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미워서 그런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그렇게 우리는 술을 조금 더 마시고 헤어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지만 볼 만한 것은 없었다.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아침밥을 대충 먹고 출근을 했다. 몸이 가벼웠다.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두 번의 수술로 인해 아기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사실 나는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명절에 사촌 동생들이 오면 함께 놀아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여동생이다. 사촌 동생들이 싫은 게 아니라 귀찮다. 나는 언니나 오빠들이 좋다. 그들에게는 내가 기댈 수 있지만, 동생들은 뭔가를 요구하기만 한다. 모르는 아이들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다. 갓난아이도 아주 예쁜 아이만 좋다. 그것도 잠시. 내가 아이를 원할 때가 있을지는 모르겠기만 원하는 데 가질 수 없는 것과 가능한데 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일이다. 여자로서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게 했다.
일에 몰두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 남자친구를 사귄다며 시간을 온통 그에게 쏟아부었다. 나만을 위한 것이 없었다. 직장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외로움이 찾아왔다. 외로움에 익숙해지기 전에 그를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평일에도 만나고 주말에도 온통 그와 함께 지냈다. 함께 하는 것은 좋았지만 나를 위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고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해 봐야겠다.
퇴근하면서 서점에 들렀다.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도 많았다. 수필 하나와 소설 한 권을 골랐다. 떡볶이를 사서 집으로 왔다. 먹으면서 책을 보았다. 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물론 순간순간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번엔 그 외로움들과 함께해 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는 전화하지 않았다. 나도 하지 않았다.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뭘 하면서 보낼지 고민이었다. 함께 일하는 언니가 산에 가자고 했다. 북한산 입구에서 우리는 만났다. 물 한 통과 김밥, 초코바 두 개를 사서 출발했다. 오랜만의 등산이라 기분이 좋았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한산은 아주 험한 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지도 않았다. 중간쯤에서 우리는 쉬었다.
“너 아프고 나서 조금 달라진 것 같아.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뇨. 특별한 일은 없어요. 그냥 사귀는 애랑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고 했어요.”
“그래? 그새 권태기야?”
“권태기? 글쎄 모르겠어요. 그냥 좀 떨어져 있고 싶어서요.”
역시 산의 공기는 맛있고 달콤했다. 복잡한 내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언니랑 얘기를 하다 보니 그와 헤어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내게 좋은 영향은 주지 못하니까. 서로 계속해서 사귄다고 해도 미래까지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는 서로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옆에 누군가 있을 때도 좋았지만 아무도 없는 상태도 꽤 괜찮았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찾았다. 목소리는 조금 낯설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였다. 집에 전화해서 내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나도 반가웠다. 그 친구랑은 대학교에 다닐 때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는데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진 후 처음이었다. 우리는 반갑게 만났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어색함은 없었다.
“여전히 건강하네. 애인은 생겼어?”
내 질문에 그는 웃고만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의 일을 얘기하고 친구들의 안부와 선생님들의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릴 적 친구란 이래서 좋은 것인가 보았다. 서로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만나지 않는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건너뛸 수 있으니까. 친구가 지내는 숙소와 내 사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것을 사양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와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잘 통했다.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였다. 주말이면 가끔 영화도 같이 보고 경기도 주변으로 드라이버도 다녔다. 그도 최근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내가 옆에서 위로가 되어 주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 역시 그를 만나면서 기분이 좋아졌고 마음도 안정을 찾고 있으니 좋은 일이었다.
눈이 펑펑 내렸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문을 나서니 온통 하얗다.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하얀 세상을 보니 출근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정신을 팔다가 출근을 했다. 가능한 한 천천히. 오늘은 지각하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세상은 온통 하얀데 직장이라는 울타리는 그 세상과 차단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4시쯤 되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퇴근하고 저녁을 함께하자고 하였다. 오늘 사무실에는 저녁 약속 전화로 다들 행복한 분위기였다. 퇴근하고 친구랑 약속한 장소로 가는 길에 어디에선가 음악이 들렸다.
‘슬~피하지 마세요.
하얀 첫~눈이 온다고요.
그때 옛말은 아득하게 지워지고 없겠지요
아스라이 사라진 기억들 너무도 그리워~, 너무도 그리워~.’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이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그와 함께 들었던 노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났다. 이정석의 첫눈. 그가 좋아하던 노래였다. 나도 좋아한다는 말에 녹음하여 내게 선물로 주었다. 테이프 겉면에는 반듯하게 제목과 가수를 적은 글씨가 멋스러웠다. 그의 정성이 느껴졌다. ‘그는 잘 지내고 있겠지? 나도 가끔 네가 보고 싶기는 해. 너도 그러니? 그러나 나는 아직 혼란스러워. 이 그리움이 너에 대한 욕망인지 너에 대한 사랑인지 헷갈려.’
친구는 먼저 와 있었다. 우리는 뜨거운 칼국수를 먹으며 어린 시절 동네에서 눈싸움하던 얘기로 즐거웠다. 저녁을 먹고 한강을 걷기로 했다. 조금 춥기는 했지만 걸을 만했다.
“이렇게 첫눈이 오는 날 헤어진 애인이 보고 싶지는 않아?”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그렇기는 하지. 그러나 … 나는 걔와 다시 안 만날 거야; 내 마음이 그렇다고 걔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자꾸 상처를 주게 되거든. 나는 그게 싫어.”
“상처? 어떤 상처를 주는데?”
조금 직설적이기는 해도 꼭 한번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친구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나도 만나면 좋기는 한데, 주변의 반대를 이겨 낼 자신도 없고, 결혼까지 갈 자신이 없어. … 내가 좀 비겁하지? 나도 알아.”
“그래서 헤어지자고 한 거야?”
“아~니. 아직 헤어지자고는 말 못 했어. 그냥 연락을 안 하고 있어.”
헤어져 있는 상황이 나와 비슷하여 놀랐다.
그는 걷다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네 생각엔 걔와 내가 결혼을 하면 잘 살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해봐.”
진지하게 묻는 친구의 말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처음엔 안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지. 워낙 여러 가지 소문들이 무성했으니까. 솔직히 나도 네가 그 아이와 사귄다고 할 때 조금 놀랐거든.”
내 말에 친구는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왜?”
나는 웃었다.
“너~무 예뻐서. 하~ 하”
친구는 내 말에 어이가 없는지 따라 웃었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너무들 잘 알고 있잖아. 우리가 모르는 과거까지. 그래서 너희 부모님도 네가 그 아이랑 사귄다고 할 때 반대를 한 것일 거야. 그리고 그 반대는 쉽게 이기지 못할 거야. 다르게 생각하면 너도 이겨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
친구가 사귀고 있는 후배는 집안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경제적인 그것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후배는 부모님이랑 함께 살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도망을 갔다. 할머니 손에 자랐다. 언니랑 둘이었는데 그 언니도 어떤 남자랑 눈이 맞아 멀리 떠났다. 결혼하면서 떠난 게 아니라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다. 사람들은 입방아를 떨었다. ‘그 피가 어디로 가겠어?’ 친구의 부모가 반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혼인하지 않는 게 좋다는 속설도 한몫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서로가 가진 상처가 다 아문 게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아픈 상처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데 느낌이 이상했다. 왠지 그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기다리고 있다면 만나야 하는가. 피해야 하는가.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시장 골목을 다 지나고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오르막길이라 조금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옆으로 걸으면서 올라갔다. 군데군데 흙을 뿌려 놓은 곳도 있었다. 매끈하니 눈이 사라진 곳도 있었다. 고개를 들어 내 집 대문을 보기가 사실 두려웠다.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땅만 보면서 올라갔다. 대문 앞에 다 다랄 즈음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없었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잔뜩 들어간 긴장을 풀었다. 안도와 허탈감이 동시에 들었다. 대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높은 지대라 동네가 잘 보였다. 흰 눈에 쌓인 도시를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었다. 샤워하면서 양치질을 하였다. 물을 한 잔 마시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11시가 다 되어갔다. 이상하게 피곤하지를 않았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덜 피곤한지도 몰랐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띠리링, 띠리링~ 망설이다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이 없는 걸로 봐서 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끊어야 하나. 아니면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 끊었다. 그도 내가 생각이 난 모양이다. 그래 나도 네가 보고 싶기는 해. 그러나 나는 너를 부르고 싶지 않아. 아직 내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