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오늘의 밴드를 소개합니다. 철이와 불나방.”
밴드의 소개와 함께 철이는 기타를 치면서 신나는 노래를 불렀다. 춤을 추는 홀의 열기는 뜨거웠다. 어느 정도 달구어진 분위기에서 철이는 기타를 한쪽으로 치우고 퍼포먼스를 하려고 음악을 바꾸었다. 끈적한 재즈곡이 연주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철이에게 쏠렸다.
철이는 모자부터 신발까지 하얗게 빛나게 있었다. 화려한 동작으로 모자를 벗자 가벼운 박수와 환호성이 나왔다. 윗옷을 벗으며 후루루 날리자 “와 ~” 하는 소리와 박수가 동시에 나왔다. 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몸짓과 함께 바지를 벗는데 “끼~ 악”하는 탄성인지 놀람의 소리인지 아무튼 여기저기에서 난리였다. 신발을 벗을 때는 설마 설마 하는 긴장감으로 무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철이는 느린 재즈곡을 부르며 다음 퍼포먼스를 위해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은 철이에게 집중하여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철이는 열광하는 반응을 온몸으로 즐기며 하나 남은 속옷을 살짝 벗는 듯한 동작을 했다. 탄성과 박수 소리에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를 마무리했다.
사람들은 테이블에 다시 앉아 술을 마시며 방금 본 것에 대해 얘기했다. “다 벗었어.”, “아니야. 벗는 척했지.” 철이가 입었던 하얀색의 옷과 조명이 사람들의 눈을 홀렸다. 사람들은 술과 음악과 분위기에 취해 자신들이 본 것에 확신이 없다. 그러나 온몸이 흥분하여 기분은 최고로 좋아 보였다. 술 주문이 늘어나고 우리들은 바빠졌다.
나는 밴드를 데리고 나가는 철이를 향해 엄지를 ‘척’ 하니 들었다. 철이는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철이를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대에서는 대담하고, 여자들과 어울릴 때는 다정다감하지만 우리랑 술을 마실 때는 거칠고 무식하여 나랑 다르지 않아 보였다. 잘빠진 몸매와 곱상한 얼굴이 본성을 숨길 수 있게 해 주는 건 아닐까. 그의 다각적이면서 이중적인 모습이 때론 부럽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분명 재주이다.
홀 손님들의 순환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 잠시 짬이 생겼다. 주방 뒤쪽에는 이미 몇 명이 자리를 잡고 쉬고 있었다. 나도 커피를 들고 앉았다.
“형님, 올 연말은 유난히 행패를 부리는 손님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 미치겠어요.”
이제 겨우 1년 된 막내가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을 말하며 투덜거리자, 우찬이가 한마디 했다.
“야,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러면 어쩌냐. 올 연말은 특별하잖아. 1999년. 짜샤. 사람들이 돈을 더 막 뿌릴 수 있잖아. 우리는 진상을 받아주고 돈을 벌자고. 안 그러냐?”
우찬의 말에 막내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99년과 돈을 막 뿌리는 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찬이는 막내의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쥐어박으며,
“짜샤, 세기말 몰라? 종말론! 올해가 끝나면 인류도 끝나고 내일은 오지 않는다…….”
“진… 짜로 그래요?”
그 말에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며 한바탕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우리를 보며 막내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야 이 바보야. 우리가 진짜로 그럴지 어떻게 알아.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지.”
우찬의 말에 막내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요즘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아?”
얕은 한숨을 쉬면서 말하는 우찬이는 꽤 심각해 보였다. 우리도 덩달아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 자식은 이렇게 맨날 우리를 들었다 놨다를 하네.’
“형님은 … 내일이 없다면 어쩌고 싶어요?”
막내의 말은 우찬이가 만들어 놓은 우물에 우리 모두를 냅다 밀어 넣었다. 우리는 말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내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과 컴퓨터가 2000년이라는 숫자를 인식 못 할 수도 있다는 말들이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Y2K 종말론으로 수십 년 전부터 컴퓨터가 두 자릿수로만 인식해 왔기 때문에 99 이후에 올 00을 받아들이지 못해 세계 곳곳에서 통신망 혼란, 정전 그리고 핵폭발 등의 대재앙이 일어나 지구가 종말 한다는 말이다. 신문에서 종말론을 꽤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9년은 익숙한데 2000은 낯설다. 지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나는 뭐 하고 싶을까. 미련이 남는 게 뭐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리로, 가슴을 후볐다.
무거운 분위기를 깬 건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지배인의 발소리였다. 우리는 후딱 정신을 차리고 젖은 몸들을 일으켰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막내의 서빙 실력은 날로 향상되고 있는 것 같다. 초반에 깨진 병이며 컵이 꽤 되었다. 컵이 깨질 때마다 엉덩이며 무릎으로 날아간 발로 인해 멍이 아물 시간이 없었다. 반토막이 된 월급은 상처보다 더했을 것이다. 팁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만두지 않았을까. 무던하면서 잽싼 눈치로 잘 버티고 있다. 우찬이는 부킹 실력이 뛰어났다. 장동건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는데 이름값을 했다. 윙크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다녀서 인기가 많았다. 부킹 제안이 왔을 때 머뭇거리는 여자들도 우찬이가 샤바샤바 하면 홀라당 넘어갔다.
나는 기도(木戶)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매니저이다. 이곳에서 일 한지 7년이 되었다. 스물아홉이지만 그 나이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또래보다 큰 덩치와 험악하게 생긴 얼굴 때문일 것이다. 군대를 다녀오고 친구들과 처음 나이트클럽에 갔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붕붕거리듯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와 왁자지껄 즐겁게 웃고 있는 사람들, 현란한 조명 아래 아무렇게 흔드는 몸짓에서 무한한 자유와 거리낌 없는 시원함을 느꼈다. 그곳은 별천지였다. 내가 가진 고민이나 아픔 따위 저 멀리 던져 버리게 해 주는 마법이 있었다. 내 세상을 찾은 것 같았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다녔다. 하도 자주 가자고 하니 친구들은 돈이 없다고, 나이트클럽은 가끔 가야 재미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야, 너는 안 지겹냐?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이 꼬이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자꾸 가자고 난리야.” 함께 갈 친구들이 떨어져 나갈 즈음, 지배인을 알게 되었다. 지배인은 나를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보면서,
“홍기야, 너 기도(木戶) 함 해 볼래?”
“네? ……제가요?”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망설여졌다.
“어렵지 않아. 입구에 서서 입장하는 사람 지켜보다가 복장이나 자세가 좀 이상하면 저지하고, 가끔 홀에서 싸움이 나면 끌어내어 퇴장시키면 돼. 음, … 네 덩치와 힘이면 가능할 것 같은데……, 어때?”
지배인이 말한 기도를 잘할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매일 클럽에 올 수 있다는 게 솔깃했다. 일단 해 보기로 했다. 처음엔 그냥 서 있기만 했다. 함께 선 형이 알아서 했다. 함께 일하는 형은 많이 없었다. 하는 걸 잘 봐야 했다. 클럽에 입장시키지 않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 거나, 나이트클럽의 물을 흐릴 허름한 복장을 한 사람이거나, 어린 학생이나 노인들은 입장 불가였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홀에 들어가서 분위기를 살피다가 싸움이 나면 말리거나 퇴장시켰다. 그들은 술에 취해 기운이 없었다. 싸움은 잦았고 내 역할은 늘어갔다.
어제는 오랜만에 거리 홍보를 나갔다. 며칠 뜸했다. 홍보를 하지 않아도 손님들이 많아서 나가지 않았더니 지배인의 뱀눈이 더 가늘어졌다. 종로 거리에서 전단지와 명함을 돌리며 공짜 술과 부킹 제공을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종로 거리는 음악들로 흥겨웠다. 코요테의 ‘순정’은 한 번 귀에 붙으면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워어어 워어어 워너 워어어어어. 나를 포기했어! 너만 사랑했어. 그것만으로도 부족했었나. 바보 같은 내게 너는 이럴 수 있니. ~~~ 어느 날, 갑자기 슬픈 내게 다가와 아픔만 남겨 주고 떠나 버렸네’
경쾌한 리듬에 금방 중독이 되었다. 음악은 분명 신나고 흥겨운데 내용은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나만 바보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노래가 있는 거 아닐까?
11시를 넘기면서 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홀에서 나와 입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잠시 쉬고 있었다. 여자 세 명이 입장하려고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가 있었다. 그녀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찌릿한 전율이 일었다. 나는 그들이 입장을 하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얼어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에 우찬이를 찾았다. 서빙을 하고, 부킹 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녀들이 있는 곳을 눈으로 훑었다. 술과 기본 안주가 들어간 상태였다. 나는 홀을 살피며 그들을 주시했다.
엄정화의 ‘몰라’를 시작으로 베이비복스의 ‘Get Up’, 이정현의 ‘바꿔’에서 사람들의 춤은 격렬해지고 있었다. 리키 마틴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잔잔한 블루스 곡이 나왔다. 그녀들은 낯선 남자의 손을 잡고 몸을 맞대며 블루스를 췄다. 짝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며 부킹을 시도하는 게 보였다. 일정한 시간이 지날 즈음 그들의 테이블에 과일 안주를 줬다. 무심한 듯 ‘서비스입니다.’라고 했지만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2시가 되자 그들은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남자 두 명이 다가왔다. 부킹을 시도해도 안 되니 직접 나선 모양이었다. 그들은 클럽을 나가고 두 명은 따라가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나갔다. 밖으로 나와서도 두 명은 포기하지 않았다. 택시를 잡으려고 하니 한 남자가 그들을 막으며 욕을 했다. 그녀들은 놀라 움찔하면서 험악해진 남자를 쳐다봤다. 거친 말을 한 남자는 계속해서 그녀들에게 뭐라고 했다. 나는 두 명에게 다가갔다. 둘을 그녀들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리고 입구에 서 있는 녀석에게 눈짓을 했다. 녀석의 도움으로 그녀들은 떠났다. 둘은 계속해서 씩씩거렸다. 나는 둘에게 내 명함을 주고 다음에 오면 확실하게 부킹을 약속하겠다며 달랬다.
그녀는 가고 없지만 잠시나마 얼굴을 봤다는 게 좋았다. 내 마음속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게 신기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다니……. 나 스스로 놀랄 일이었다.
그녀가 내게 삐삐 번호를 주었을 때, 담담히 받았지만 내 심장은 무섭게 뛰고 있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삐삐를 쳤다. 전화가 오면 어떻게 받을지, 어떤 식으로 인사할지 연습을 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번호를 줄 때는 언제고, 연락을 안 하는 건 뭐지.
“우찬아, 뭐 좀 물어보자.”
내 물음에 우찬은 나를 봤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냐?”
우찬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멀뚱히 본다. 그러더니,
“너, 사귀는 여자가 있었어?”
“그게… 지난번에 퇴근할 때 있잖아. 술에 취해서 밥 사 달라고 했던 여자. 기억나?”
우찬은 한참을 생각했다.
“아, 맞다. 그때 너를 콕 집었던 여자 말이야?”
“그래, 그 여자.”
“그때 밥 사 주고 별일 없었다며?”
“별일 없었지. …그 여자가 삐삐 번호를 적어줬어. 심심하면 하라고. 근데 삐삐를 쳐도 답이 없어. ……이거 뭐냐?”
“언제 삐삐를 친 거야?”
“어… 그게… 일 마치고 할 때도 있었고, 출근 전에도 했고….”
“일 마치고는 그렇지만, 출근 전이면 답이 올만 한데……보통 여자들은 단번에 답을 잘 안 하는 경우가 많아. 좀 튕기는 거지. 음… 기다려 봐.”
“기다리라고? 삐삐는 … 치지 말고?”
“그렇지. 자꾸 하면 그쪽은 시들해지지. 아마 며칠 있다가 그 여자가 클럽에 놀러 올 수도 있고, 연락할 수도 있을 거야. 그게 … 여자들의 마음은 참 복잡해서 … 나도 어려워.”
우찬이는 그렇게 말하고 내 어깨를 툭툭치고 자기 할 일을 하러 갔다. 기다리라는 말은 내게 희망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우찬이는 연애 고수답다.
며칠 전 그녀를 본 후 다시 삐삐를 쳐 볼까 많이 망설였다. 기다리라는 우찬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뒤숭숭한 기분으로 일어났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미용실로 향했다.
‘이화 미용실’은 몇 달 전부터 가기 시작했다. 원장의 과묵함이 마음에 들었다. 낯을 많이 가리고 숙맥인 나에게 딱이었다. 미용실 문을 여니 원장이 파마를 하면서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직원이 다가오면서 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어디선가 본 듯 낯이 익었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조금 자르고 갈색으로 염색해 달라고 했다. 여자는 익숙한 듯 큰 수건을 내 목에 두르고 가위질을 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봤지? 왜 낯이 익지? 이상하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보통 나는 머리를 자를 때 눈을 감고 잤다. 그러나 이 여자로 인해 잠이 오지 않았다. 염색을 하고 머리를 감기 위해 샴푸실로 이동했다. 샴푸를 하고 머리를 헹구면서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절 기억하지 못하네요.”
그러면서 그녀는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녀다. 언제부터 이곳에 근무했지? 왜 여태 몰랐을까?’ 밤에 본 그녀의 모습과 다른 분위기라 금방 알아보지 못한 건가. 내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머리를 말리면 나가야 한다. 어찌해야 할까. ‘삐삐를 쳤다고 말해야 하나. 왜 답이 없냐고 물어야 하나.’
결국 나는 한마디 못 하고 미용실을 나왔다. 그날은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다음 날 전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그녀였다. 쉬는 날이라 점심을 산다며 나오라고 했다. 돈가스를 자르는 내 손이 떨떨 떨렸다. 그런 내 모습을 그녀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점심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궁금했던 것을 물을까 말까 하다가 기어 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가 …두 번이나 삐삐 했는데… 혹시 아세요?”
“예. … 알아요.”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제가 술이 약해요. 그리고 … 술만 마시면 삐삐 번호를 아무에게나 줘요. …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미안해요.”
나는 그녀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럼, 오늘 만남은 뭐예요? ……”
내 말에 그녀는 나를 봤다. 밥을 먹을 때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우리는 마주 보았다. 그렇게 서로를 보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바로 시선을 내렸을 테지만 그녀의 말에 화가 나서 쏘아보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나는 내친김에 말했다.
“우리……친구 할래요?”
“아뇨.”
“…….”
그녀의 대답은 내 뒤통수를 세게 친 듯 멍하게 만들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남은 커피를 마시고, 목이 타서 옆에 있는 생수를 더 마셨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홍기 씨”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우리 … 사귀어 보는 건 어때요?”
“예?…….”
나는 다시 바보가 되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얼어 있던 내 몸은 녹아서 기체가 되어 붕붕 떠다녔다.
출근하는 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니 자잘한 실수를 했다. 티가 나지 않는 것이라 넘어갈 수 있었다. 우찬이와 막내가 그런 나를 이상하게 봤다. 주방 아주머니는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싱글거리며 괜찮다고 했다.
퇴근하면서 그녀의 삐삐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내게 남겨진 메시지를 확인하는 건 산다는 기쁨이었다. 허리에 찬 삐삐에 어떤 메시지가 남겨졌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101101(기분 좋아)은 미용실에 손님이 많이 다녀가고 쉴 때 남겼고, 2222(투덜투덜)은 짜증 나는 일이 있으면 보내왔다. 그러면 나는 9999(힘내)를 보내고 0035(사모한다)를 남겼다. 마음은 0027(땡땡이 치자)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녀가 쉬는 날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밥을 다 먹을 때쯤 그녀가 물었다.
“홍기 씨는 왜 집 얘기를 안 해요?”
“…….”
그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아득해졌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거짓으로 부풀려 일단 안심을 시켜야 할지…….
“할머니와 엄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멀리서 일하고 계시지만 … 연락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그랬구나. ……엄마는 어떤 분이셨어요?”
엄마는 ……할머니의 폭언에 시달리면서 늘 주눅 들어 있었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집안일을 하였지만 그마저 서툴러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엄마의 관심을 바랐던 적이 있었나? 할머니는 나를 손자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함께 살 때는 집에 가기 싫어 방황했고, 할머니와 엄마가 죽고 나서는 뿌리 떨어진 나무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 응답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할머니의 욕설을 듣지 않아서 시원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엄마는, 울 엄마는 잘못 태어난 세상에서 구박만 실컷 받다가 하늘로 가 버렸다. 그나마 정신을 놓았을 때, 온 동네를 다니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좋았을까? 바싹 마른 엄마의 몸, 늘 근심 어린 표정, 주눅 들어 축 처진 어깨, 공허한 시선. 환하게 웃는 엄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왜 말이 없어요?”
그녀는 가만히 있는 나를 걱정하며 말했다.
“엄마에 대해 말할 게 별로 없어요. 어릴 때부터 늘 아프셔서 엄마랑 뭘 한 기억이 없어요.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내 몸을 데우고 내 마음을 녹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흐르는 눈물에 놀라서 두 손으로 쓱쓱 닦았다. 덩치는 산만한 게 어찌 그리 유치하게 구느냐고 나무랄까 봐 겁이 났다. 할머니가 불쑥 나타나 두 눈을 크게 뜨고 뭐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불안해하는 나를 달래 주었다.
그녀로 인해 내 삶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힘든 하루가 수월하게 지나갔다. 그녀는 웃음이 많았고, 입 안이 다 보이도록 크게 웃을 때는 나도 모르게 전율이 일었다. 그녀로 인해 내 삶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는 한 달에 두 번 쉬었고, 나 역시 한 달에 한 번 쉴까 말까였다. 사실은 쉬는 날이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만났다. 출근하면서 미용실에 잠시 들러서 얘기를 나누었고, 퇴근하면서 삐삐로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오면 그녀는 전화를 했다. 밤이 늦도록 우리의 통화는 이어졌다. 잠을 적게 자도 몸은 쌩쌩했다.
나와 그녀가 이어졌다고 느껴지는 시간이 길어질 즈음, 불안감이 조금씩 밀려왔다. 불안감과 함께 그녀와 만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미용실로 가면 그녀는 바쁘다며 앞으로는 가능한 연락을 하고 만나자며 차가워졌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출근해야 했다. 그녀는 왜 내게 화가 났을까. 이유를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녀의 화는 언제쯤 풀어질까. 수많은 의문을 달고 다니며 내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
우찬이가 나를 불렀다.
“야, 인상 좀 펴라. ……너 무슨 일 있지?”
나는 우찬이의 질문에 놀랐다.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우찬이는 재차 물었다. 나는 마지못해,
“왜 묻는데?”
평상시와 다르게 퉁명하게 말했다.
“아니, 얼마 전에 말이야. …… 너 쉬던 날, …그 여자와 일행들이 왔었거든. 철이 일행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나갔단 말이야. … 이게 보통 일이야? …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요즘 네 표정을 보니 뭔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아니야?”
우찬이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하필 내가 쉴 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차가워졌나. 그녀도 철이에게 넘어간 건가.’ 속이 쓰렸다. 우찬이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찬인 내 눈치를 살피며 나갔다.
공연 시간이 되니 철이와 그 일행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자리를 피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꼴 보기 싫어졌다.
홀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철이의 공연이 끝난 후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손님들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몇 시간 후 그들은 여자들과 함께 클럽을 나갔다. 녀석은 역시 대단했다.
나는 늘 가던 미용실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지만, 나는 습관처럼 그녀에게 삐삐를 치고, 가끔 메시지를 남겼다. 미련스러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돌아왔으면 했다. 내 발걸음은 미용실 주변을 맴돌았다. 멀리서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클럽으로 갔다.
그날도 습관처럼 그녀가 일하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미용실 밖에서 누군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건물 뒤로 얼른 숨었다. 말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녀랑 얘기하는 그 남자의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하얗게 염색한 머리색이 도드라져 보였다. 목뒤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잠시 후, 그녀는 미용실로 들어가고, 돌아서 나오는 그 남자의 모습은 ……역시 철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놈은 나를 지나쳐 멀리 사라졌다.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 어려웠다. 벽을 쳤다. 꽝 소리와 함께 주먹에 피가 튀었다. 아픈데 아프지 않았다. 더한 고통으로 나를 괴롭히고 싶었다.
클럽에서 간단하게 약을 바르고 장갑을 꼈다. 내 신경은 다른 날과 달리 예민해졌다. 모두 조용하니 자신의 일을 했다. 나는 홀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서빙을 하다 실수하는 신참의 엉덩이를 걷어찼고, 술에 취해 소란스럽게 구는 손님은 가차 없이 쫓아 버렸다. 나는 홀과 정문을 오가며 쉴 틈 없이 살폈다.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인해 저녁은 생략했다. 1시가 다 되어갈 즈음 피곤이 몰려왔다. 정문으로 나와 멀찍이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 입구에 있는 녀석에게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줄을 선 사람들의 의상이 평상시와 달랐다. 한껏 꾸미고 일부러 반짝이를 한 옷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뭐냐고 다시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거냐는 질문에 화가 났다. 녀석은 “오늘 댄스 경연대회잖아요.” 하면서 내 표정을 살폈다.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나이트클럽의 중요한 행사를 잊고 있었다. 급히 홀로 들어가서 무대를 살폈다. 잔잔한 곡이 나오는 중에 무대는 조용하면서 신속하게 꾸며지고 있었다. 무대 옆에 마련된 대기실로 갔다. 오늘 특별초빙 된 사회자는 이미 와 있었다. 애써 웃으며 어색한 악수를 했다. 아마 넋이 나간 나 대신 우찬이가 확인 전화를 돌렸으리라. 지배인이 알았다면 모가지 감이다.
사회자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무대로 나갔다. 그의 진행으로 댄스 경연이 시작되었다. 현란한 음악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와 춤을 추었다. 자유롭게 춤을 추다가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두 팀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관중의 박수에 의해 탈락이 정해지면서 클럽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들이 추는 몸놀림은 유연하면서 영혼이 숨어 있는 듯 묘했다. 아무렇게나 흔드는 동작과는 달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는 줄어들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춤에 열광했다.
최종 후보로 세 사람이 선발되었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마지막 노래로 테크노가 나왔다. 몸의 뼈들이 꺾이는 동작과 팔의 우아함이 번쩍이는 조명등과 함께 하나가 되었다. 누가 불빛이고 누가 사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춤은 조화로웠다.
최종 승자를 가리기 위해 진하면서 느린 음악이 나왔다. 조명은 푸른 물결을 이루었고 셋의 춤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자 댄스가 남자의 손을 잡아 커플이 되어 블루스를 추었다. 남은 여자는 둘이 뿜어내는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탈락했다. 사회자는 둘을 우승자로 선정했다. 두 사람은 황금으로 된 두꺼비를 상으로 받았다.
댄스 경연이 끝나자 팡파르가 울렸다. 손님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맥주는 손님들의 테이블에 올려졌다. 서비스로 나가는 행사였다. 손님들은 클럽에서 주는 서비스에 만족하며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광란의 춤을 췄다. 댄스 우승자와 함께하는 나이트클럽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주방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빈속에 마시는 알코올은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것 같았다. 우찬이도 들어와 물을 들이켰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등을 가볍게 쳤다. 우찬은 싱긋 웃으며 나갔다.
아마 오늘은 다른 날보다 늦게 끝날 것이다. 마음을 다지고 홀로 향했다. 방방 거리는 음악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살피며 전체를 돌았다.
술을 마시며 여자들과 속닥거리는 테이블에 시선이 갔다. 철이었다. ‘저놈은 오늘 공연도 없으면서 뭐 하러 왔지?’ 뻔한 속내가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한 바퀴 도는데 홀의 열기에 내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정문으로 나가니 둘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나는 괜찮다며 쉬어라고 하며 벽에 기대어 저 멀리 거리로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술과 음악에 취한 사람들은 흥겨워 보였다. 그때 철이 일행과 여자들이 함께 나왔다. 여자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하니 철이가 말렸다. 그러면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자는 철이의 힘에 낮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뭐에 이끌리듯 철이에게 다가갔다.
“여자분들 보내 드려.”
내 말에 철이는,
“네가 뭔데 간섭이야. 너는 … 네 일이나 해.”
“이게 … 내 일이야.”
철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봤다. 이죽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향해 주먹이 나갔다. 코피와 동시에 윽 하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코피를 쓱 닦으며 내 배를 쳤다. 그러나 살짝 스치는 정도였다. 나는 녀석의 가슴을 세게 가격했다. 그는 휘청 넘어지면서 바닥으로 굴렀다. 넘어진 녀석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발로 짓밟았다. 얼굴을 감싼 채 신음하는 꼴이 우스웠다. 옆에 있던 다른 녀석이 나에게 덤볐다. 두 팔을 잡는 동시에 몸 전체를 바닥으로 던졌다. 쿵 하는 소리가 나고, 나는 발로 그의 가슴을 찼다. 일어나려는 녀석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때리고 공격했다. 온 힘을 다 쏟았다. 숨이 가빠왔지만 상관없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패고 또 팼다. 곤죽이 된 놈들과 마찬가지로 기운이 빠질 때쯤 윙 하는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내 스물아홉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1999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