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둘. 165센티미터에 58킬로의 몸무게, 어깨까지 닿을락 말락 하는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물들였다. 약간의 웨이브를 지닌 내 머리카락은 나를 한층 부드러운 이미지로 보이게 한다.
나의 첫인상이 조금 차갑기 때문에 부드러운 느낌은 아주 중요하다. 목소리의 톤도 의식적으로 낮고 차근차근하게 들리게 하려고 애를 쓴다. 평소에 높고 큰 목소리 때문에 화가 나 보인다는 얘기를 들어서 신경을 쓴다.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관심에 의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니다. 반대다. 나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너무 쓰지 않으니 간혹 오해를 해서, 오해를 사지 않을 정도만….
어제 나는 몇 시에 들어왔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술 때문이 아니다. 음악 때문이다. 주말이라 직원들과 클럽에서 신나게 놀았다. 자주 가는 클럽인데 어젯밤은 조금 별나게 재미있었다. 색다른 경험을 했다.
디자이너 한 명과 편집부 직원 세 명이 갔었다. 결혼을 한 두 명은 먼저 퇴근을 했기에 나까지 합해서 다섯은 웨이터가 잡아주는 자리에 앉았다. 저녁 12시. 슬금슬금 불나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댄스와 블루스 타임이 몇 번 지나고 나자 우리는 어느새 남자들과 합석을 이룬 상태였다. 상대방은 네 명이었지만 우리는 상관없었다. 짝을 이루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 그들과는 가벼운 말을 주고받으며 술과 음악에 취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에는 한 명씩 두 명씩 사라지고 있었다. 술에 취하여 슬그머니 집으로 간 사람도 있고, 상대방이 마음에 들어 따로 나간 이들도 있었다. 이번에 합석한 이들 중에 내 시선을 끄는 이는 없었다. 나는 대충 그들의 말을 들어주면서 음악과 춤에 취해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새로운 음악이 나왔다. 새로운 디제이가 등장한 것이다. 한 달에 보통 두세 번 왔는데, 처음 보는 디제이였다. 훤칠한 키에 짧게 자른 머리는 온통 은색이었다. 머리 색깔 때문인지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옷은 위아래로 검은색이었다. 빠른 테크노의 음악에서 진한 재즈풍의 블루스가 흘렀다.
음악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음악에 취하고 싶었다. 남자의 품에 안겨 춤을 추면서 내 시선은 디제이에게 가 있었다. 노골적이다시피 바라보았다. 알고 싶은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현란하게 돌아가는 조명과 연한 선글라스 사이로 눈매가 언뜻언뜻 보였다. 내 눈빛과 몇 번 마주쳤다. 디제이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치고 있었다. 뜨거운 듯 강렬한 그의 눈빛에 전율이 일었다. 취하는 듯한 블루스는 두 곡을 끝으로 빠른 댄스로 바뀌었다.
자리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분명 나는 술을 얼마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가 멍하니 이상했다. 음악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는지 디제이가 그렇게 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나를 수습해야 했다. 화장실로 갔다. 비틀거리는 그녀들이 보였다. 내 몸은 멀쩡했다. 산란해진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시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이 방법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오늘은 이쯤 해서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몇 걸음 걸었나?
내 눈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은색 머리의 디제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내 시선으로 나를 찾은 것일까, 아니면 머리에 앉아 있는 반짝이는 나비핀으로 나를 찾은 것인가? 뜨거운 시선은 나를 집어삼킬 듯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시선을 받았지만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들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요란한 음악 소리로 시끄러웠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망설임 없이 잡았다. 그는 내 손을 잡고 클럽을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갔다.
어둠 속에서 본 그의 몸은 날씬했지만 벗은 그의 몸은 탄력이 넘쳤다. 그의 몸에선 진한 블루스가 느껴졌다. 슬픔의 블루스. 나는 그의 슬픔을 마시면서 한껏 즐겼다. 내 기분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듯 서로를 느꼈다.
어느 순간, 눈을 떴다. 핸드폰의 액정을 눌렀다. 3시 30분. 옆에 있는 물을 마셨다.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방안의 불을 켰다. 그가 내 곁에 있었다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번쩍거리는 불빛을 보며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정신이 멀쩡한 듯 멍한 듯 아리송했다. 샤워를 하면서 그를 생각했다. 우리는 어젯밤 둘 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떠나면서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남겨지지 않은 흔적에서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건 뭐지? 왜 내가 그를 생각하고 있지? 그는 뭐지? 주술사인가? 음악으로 나를 홀리고 떠난 그의 정체가 왜 내 머리를 떠다니고 있지?
다시 잠을 자기는 했지만 영 개운 하지가 않았다.
주스 한 잔을 마시고 집을 나섰다. 수영장으로 갔다. 몸을 가볍게 풀고 시작은 느리게 자유형으로, 다음은 배영으로 물을 느꼈다. 몸을 움직이니 머리는 가벼워졌다. 배가 고프기는 한데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다. 쇼핑이나 할까 고민하다가 식당으로 가서 비빔밥을 먹었다. 호박, 오이, 숙주, 콩나물, 계란으로 비벼진 밥을 먹으며 머리를 비웠다.
“편집 회의 합시다.”
내 말을 들은 편집부는 하나 둘 수첩과 필기구를 챙기며 회의실로 이동했다. 둥근 탁자엔 디자인 두 명과 편집부 일곱 명이 앉아 있다. 각자 마실 음료를 가지고 왔다. 내 손에도 커피가 들려 있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다. 크고 약간 튕기는 듯한 톤 때문에 말을 할 때에는 항상 신경을 써야 한다. 의도와 달리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각자 맡은 분야의 상황을 일단 들어 봅시다.”
내가 입을 떼자마자 편입팀에서 먼저,
“편입 영어는 교정 마무리 단계이고요, 곧 인쇄소로 넘길 예정입니다.”
이 대리의 말에 나는 한 번 더 교정을 보고 넘기라고 한다. 매사에 급한 이 대리이기에 끝났다고 했을 때 한 번 더 체크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공무원 시험 대비 각 교재는 오늘 서점으로 배포할 예정입니다. 법률 부분의 새로운 저자는 현재 섭외 중이고요.”
편집부 팀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일단 저도 몇 명 알아보고 있는데, 가능하면 인기 있는 저자를 잡아야 해요. 물론 쉽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디자인팀으로 시선을 주었다.
“새로운 교재의 기본 디자인은 마무리되었는데 칼라 부분에서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내일까지 확정을 지어, 보고 하겠습니다.”
허대리의 말을 듣고, 신입팀을 보며 나는 말했다.
“그리고, 오타나 오답에 대한 문의 전화 체크 잘하고 있겠죠?”
“예. 과목별로 나누어 체크하고 있습니다.”
“상식 부문에서 시사 상식과 새로운 정보는 누가 체크하고 있죠?”
“편집부 막내 둘이 하고 있습니다. 스크랩하면서 정보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디자인팀을 보며 말했다.
“상식도 새로운 디자인 신경 써야 할 겁니다. 너무 편안한 색 말고 심플하면서 눈에 확 들어오는 걸로 했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그렇듯 월요일은 정신없이 지나간다. 할 일은 산더미처럼 있는데 한다고 해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인 듯 남아 있다. 인쇄소에 넘기기 전 최종 교정본을 점검하고 있는데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자가 왔다.
‘출장 갔다가 이제 왔어. 오늘은 조금 바쁠 것 같고 내일쯤 보자.’
민수의 문자는 참으로 담백하다. 요점만 간결하게. 그게 민수의 매력이다. 군더더기가 없다. 질척거림이 없다. 조르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가 아쉬우면 보는 사이이다. 가끔은 위로가 된다. 우리는 연인 같은 친구이다. 연인이 될 뻔한 친구인가? 나는 지금 우리 관계가 편하고 좋다.
디자인팀의 허 대리는 나와 동갑이며 애인이 있다. 애인과는 벌써 6년이 지났다. 둘의 관계는 미묘하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둘을 보고 있으면 갑갑하고 숨이 막힌다. 끊임없이 퍼 주고 아낌없이 다 주는 허 대리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허 대리는 애인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허 대리의 애인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어떤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 허대리의 애인은 여행을 좋아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도 자주 간다. 둘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을 혼자 간다. 여행을 다니느라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가.
나는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 한 집에 같이 살면서 재미없게 살 자신이 없다. 둘이 같이 있으면 즐거운 시간은 잠깐이다. 지겨움을 느끼며 같은 공간에 있는 건 힘들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가. 어딘가에 있으면서 허기를 달래듯 가끔 만나는 사이, 없다고 느낄 때쯤 느껴지는 존재, 그게 사랑이 아닐까. 모르겠다. 쉽지만 꼭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랑이니까.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데 허 대리와 막내 미영 씨가 내게 한 잔 하자고 한다. 내일은 주말이라 출근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서 좋다. 우리는 신촌으로 갔다. 호프집에서 마른안주와 소시지 야채볶음과 맥주를 시켰다.
“오늘은 어쩐 일로 허 대리가 약속이 없는 거야?”
내 말에 허 대리는 맥주를 목에 들이붓듯이 마신다.
“어제… 중국에 갔어.”
체념한 듯 짜증스러운 톤으로 말한다.
“대리님도 함께 간다고 하지 그랬어요?”
막내의 말에 허 대리는 피식 웃으며,
“출장 겸 가는 여행이라 함께 가도 재미없어. 그놈은 날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
술도 취하지 않은 허 대리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나는 허 대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잡아채듯이 물었다.
“그래, 잘 아네. 널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 그런데도 그놈에게 목매는 이유가 뭐냐?”
나는 정말 궁금하다. 허 대리는 누구에게 내놓아도 절대 꿀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집안 좋고 날씬하며 성격도 별로 모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편단심 그놈에게 목을 매는 게 이해할 수가 없다.
허 대리는 중대한 결단이라도 내는 것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맥주를 한 잔 더 마셨다. 잔을 내려놓고, 나와 막내를 한 번 보더니,
“왠지 그놈이 내 인생의 마지막일 것 같아서…”
“뭐? 마지막?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럼 그렇지. 아휴 답답해.”
나는 뭔가를 기대한 내가 바보 같아서 투덜거리며 술을 마셨다. 막내는 술보다 안주를 더 많이 먹으며 웃고 있었다.
“답답해? 내가 답답하다고? 그러는 너는?”
허 대리는 오늘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묻는다.
“내가 왜?”
“이놈 저놈 끌리는 대로 만나는 니는 잘났냐?”
“그래,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보자. 막내, 니는 어떤데? 누가 더 이상한 거냐?”
막내는 우리 둘의 이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웃기만 하고 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술을 권하고 감자튀김을 시키면서 내가 원하는 답을 하도록 은근하게 재촉했다.
“저는 두 분 다 이해해요.”
막내는 끝까지 누구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건가.
“아니, 이해해 달라는 게 아니라 누가 더 이상한 거냐고 물었잖아.”
나는 나의 승리를 장담하며 물었다.
“전 정말로 두 분의 연애방식에 이의 없어요. 어떨 때는 과장님의 연애 스타일이 좋고, 어떤 때는 대리님의 방식이 좋아요.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도 좋고,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만나는 것도 매력적이잖아요.”
막내의 말에 나는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허 대리와 나는 기운 없는 웃음을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막내는 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입사했다. 입사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큰 출판사가 아니기 때문에 시험을 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필요하면 공고를 내어서 면접을 보고 뽑기도 하고, 누군가의 추천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작은 출판사는 경험을 쌓기 쉽고 그만두기도 쉬운 곳이다. 내가 다니는 출판사는 아주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다.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조직이라는 느낌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적 없어?”
나는 갑자기 두서없는 말을 끄집어냈다. 둘은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둘의 집중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자~꾸,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닌데 자꾸 누군가 생각이 나고 떠오른 적 있어?”
허 대리는 내 말에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누가 그런데?”
“아니, 누가 그런다기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허 대리가 수상한 내 낌새를 알아채면 곤란하니까.
“우~ 수상한데… 인연이니 운명이니 믿지 않는 네가 그런 냄새나는 말을 하다니. 빨리 털어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걸 말해야 하나. 잠시 이러다가 사라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우리 지난번에 갔었던 클럽에서 새로운 디제이 혹시 기억나?”
내 말에 둘은 생각을 쥐어짜고 있는 듯했다.
“은색 머리의 디제이 말이야.”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허 대리의 말에 나는 그만 맥이 빠졌다.
“아, 됐다. 술이나 마시자.”
맥주를 마시는 나를 보는 둘의 시선이 따갑다.
“우- 너 그놈이랑 뭔 일 있었구나. 그렇지?”
허 대리의 장난스러운 말에 나는 약간 화가 났지만 삼켰다. 화제를 허 대리의 애인으로 바꾸었다. 하룻밤의 장난으로 넘길 것으로 생각할 것이 뻔하니까.
“야, 너는 정말 그놈이랑 운명이라고 생각해? 그런 거야?”
“어? 그~놈? 심하다. 내가 그놈이라고 하는 거랑, 네가 그놈이라고 하는 거는 다르잖아.”
허 대리는 괜히 화를 낸다. 그놈이 그놈이지. 뭐냐고.
“아니, 그러니까 니는 그놈이랑 결혼이라는 걸 할 자신이 있는 것이냐고?”
“자~신?”
허 대리는 이제 제법 취했다. 자신이라고 말을 할 때에는 혀가 약간 꼬였다. 술에 약하고 남자에 약한 허 대리.
“있잖아. …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제 조금 지~쳐. 그놈은 하고 싶은 것 실컷 하고 다니면서 나를 애인이라고 부려 먹고, 나는 결혼이라는 걸 하고 싶어서 오매불망 목매고 있는 거, … 좀 우스워.”
“그래. 이제야 이성이라는 것이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허 대리의 표정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 더 했다가는 눈물을 쏟을 것처럼 목소리에 습기가 촉촉했다.
나는 그녀의 푸념을 들으며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많이 힘든 모양이다. 햇수로 벌써 몇 년인가.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녀가 그놈에게 쏟는 애정과 시간에 비해 그놈이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조금 취한 허 대리는 택시에 태워 보내고 막내와 나는 헤어졌다. 집으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극장으로 갔다. 늦은 시간이라 좋은 자리를 고를 수는 없겠지만 혼자서 보는 느낌은 꽤 괜찮은 편이다. 술이 들어갔기에 내 감성은 높이 높이 오르고 있다. 다행히 멜로였다. 팝콘을 먹으며 높이 오른 감성에 충분히 젖을 수 있었다.
극장을 나오며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었다. 민수였다. 왜 전화를 했을까? 살짝 궁금하기는 했지만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마트에서 빵과 캔맥주, 라면, 물을 사서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다시 전화가 울렸다. 민수였다. 나는 받지 않았다. 또 술에 취한 모양이다. 민수는 가끔, 아주 가끔 술이 오르면 내게 전화를 하곤 한다. 평상시에는 정해진 약속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인데 알코올이 그를 가끔 변화시키기도 한다. 몇 번 응대를 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처음에는 옆에 있었기에 괜찮았다. 민수가 그런 부류인걸 몰랐으니까. 두 번째는 함께 밤을 지내고 자고 있는 그를 두고 집으로 왔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집에서 씻고 쉬고 있는데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나는 어제 봤는데 뭘 또 보냐는 답을 보냈다. 그때 보낸 놀라운 문자. 우리가 어제 만났었냐는 답. 그는 술이 과하게 들어가면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민수와 가능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 본 남자와 마음이 통해서 하룻밤 같이 보내기도 한다. 가끔이지만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런 경우는 말 그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끌려 육체를 나누어 가진 것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각자의 길로 간다. 내가 먼저 일어나서 나오기도 하고 상대방이 먼저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민수와 나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다.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밤을 보냈는데 그걸 기억하지 못하다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내 마음에서 민수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특히 밤을 함께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아무도 내가 사는 곳을 모르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감정대로 무작정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예전에 어쩌다가 두 남자를 동시에 사귄 적이 있었다. 의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먼저 사귀고 있던 남자와는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등산을 하다가 만난 연하의 남자가 계속해서 다가오는 바람에 얼떨결에 사귀게 되었다. 연하의 남자와 연극을 보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데려다준다고 하였다. 괜찮다고 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느낌이 이상했다. 전 남자 친구가 집 부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죄를 짓는 듯 이상했다. 집으로 가던 길을 다시 돌아 나와, 카페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연하남을 그곳에서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 예감처럼 전 남자친구는 집 앞 마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집을 알려 주지 않는다. 민수도 모른다. 이사를 하고 나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나만의 공간을 침범당하는 느낌을 또 당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남자들은 가끔 착각을 한다. 여자가 싫다고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나는 그게 제일 싫다. 나는 남자와 연애를 할 때 밀당을 하지 않는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사실 그대로를 보여준다. 나는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 결혼을 꿈꾸지 않기에 결혼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없다. 지금 내 일이 좋고 내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
클럽이나 호프집에서 즉석으로 만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일이 있는 경우 그것으로 끝이다. 즐거운 밤을 보내고 나면 함께 한 사람의 얼굴이나 그 모든 것을 지운다. 아니, 생각나지 않는다. 여러 남자를 만났지만 특별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상대방을 잘 모르기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만족만 채우고 잠드는 경우도 있었고, 나를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는 진리가 있었다. 몸이 주는 순간의 즐거움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 즉석의 만남은 만남으로 끝나는 게 맞는 일이었다. 세상에 별스러운 남자는 없었다.
민수와는 오래 만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계속 만날 수 있다. 얘기가 잘 통하고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불행히도 민수와는 영혼은 통할지라도 육체적인 결합은 더 이상 하기 싫다. 어찌 보면 그게 나를 외롭게 한다. 둘 다가 되면 참으로 좋으련만.
민수와 만나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본다.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사무실 사람들이 안주거리로 올라온다. 민수는 이 부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맨날 이 부장 얘기다. 그의 바로 위 상사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마당이 조금 있고 아담한 주택을 가지고 싶다. 집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집의 설계에 대해 말한다. 민수는 건축설계를 하기에 우리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진다. 내가 하는 설계는 비정상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가 하는 설계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가 꿈꾸는 집을 언제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른다. 언제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이 중요하다. 상상을 하고 그런 집을 설계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 번잡스럽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거리.
작은 마당에는 싱싱한 풀들이 자라고 있고, 자잘한 꽃들이 있다. 집 담장은 그리 높지 않다. 마당이 보일 정도이니 낮다고 해도 좋으리라. 집의 외양은 기와집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대식이다. 붉은 벽돌이 돋보이며 이층이다. 내부는 물론 현대식 구조이다. 바람이 들지 않아야 한다. 거실은 널찍하다. 집의 방향은 햇살이 잘 드는 남향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상상하는 집의 구조이다. 1층에 방을 몇 개 할지, 2층은 어떤 식으로 할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냥 따뜻하면서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을 가진 집을 상상하는 게 재미있다. 내 집이 가지고 있는 주변의 느낌을 생각하는 것도 괜찮다.
민수는 말한다. 현실에서 지어지고 있는 건물과 누구나 꿈꾸는 건물은 많이 다르다고. 그러나 내가 상상하는 건물 정도는 자신이 설계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 우리는 웃는다. 우리 둘 다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웃는다. 민수의 매력은 바로 그 점이다. 내가 하는 어떠한 이야기에도 딴지를 걸지 않고 지지해 주는 점. 민수는 참 멋진 친구이다.
한동안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사라질 줄 알았다. 그 남자. 강렬한 이미지 때문인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잊히지를 않는다. 클럽에 가서 다시 만나 봐야 할까. 계속해서 남아 있는 이 잔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가야 했다. 두 번을 더 갔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강렬하게 남아 있었던 그의 이미지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허 대리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애인과 약속을 잡지 않는다. 보통은 그녀가 만나자고 보채는 쪽이었는데 요즘은 역전되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온 것 같다. 요즘은 소개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겨울이 왔다. 찬 바람에 옷들이 두꺼워지고, 하늘이 살짝 낮아진 듯 느껴진 날, 눈이 내렸다. 퇴근길에 서점으로 갔다. 책을 몇 권 사서 근처에 있는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까페라떼를 시켜 마시면서 책을 보고 있었다.
시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무심코 본 창에 비치는 어떤 얼굴. 나는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놀라 벌어진 입으로 창을 한참 바라보았다. 은색 머리. 잊힐 듯 잊히지 않던 그 사람.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보니, 창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에 비치는 것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손님이 커피를 가져가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빛. 그는 나를 보았다.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한동안 부딪쳤던 시선을 거두고 나는 커피를 마셨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내가 찾던 그 사람. 저 사람이 그 사람일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것 같은 느낌은 있었다. 그는 나를 모를 수 있다. 책으로 시선을 보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리에 계속해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이었다.
나를 기억했다면 내 자리로 왔겠지? 그는 나를 잊은 모양이다. 아니, 모를 수 있다. 잊은 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 날, 일부러 그곳에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그가 주는 커피.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무심한 듯 사서 자리에 앉았다. 책을 보면서 몇 시간을 있다가 왔다.
허 대리가 청첩장을 돌렸다. 한 달 후로 잡힌 결혼식. 그녀는 예쁜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우리는 축하 파티를 열었다. 호프집에서 신나게 마시고 클럽으로 달려갔다. 결혼하는 그녀를 축하해 주어야 하는데 역시나 내 기분은 허전했다. 다들 나가서 신나게 흔들고 있을 때 물었다.
“그놈은 알고 있니?”
허 대리는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우는 것처럼 찡그린 쓴웃음이었다.
“며칠 전에 청첩장을 줬어. 근데 아무 말이 없더라. 그게 말이 되니?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어?”
지나치게 큰 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너는 뭐를 기대한 건데? … 그놈도 놀라지 않았을까?”
“놀라긴 했겠지. … 그래, 당황한 얼굴이기는 하더라.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우리는 슬픔을 함께 한 동지처럼 부어라 마셨다. 신나게 놀았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불빛과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은 그녀의 마음을 알려나. 세상일이란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인가. 그녀의 결혼은 왜 나를 불안하게 할까. 결혼이라는 선택을 잘한 것일까. 꼭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만 할까. 묻고는 싶었지만 상처를 줄 수도 있어서 그만두었다.
그녀의 결혼은 예상과 달리 나를 허전하게 만들었다. 반면 그녀는 활기차졌고 얼굴이 밝아 보였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허 대리와 나는 서로에게 솔직한 편이었고 비밀 없이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생각했다.
어느 시점부터 고민을 나누기보다 가슴에 숨겨 두는 것 같았다. 그녀의 결혼에 대해 내가 잘 알지 못하듯이 그녀도 요즘의 나에 대해 잘 모른다.
사무실에서 꽤 떨어져 있는 그 카페를 이틀에 한 번은 들린다. 물론 커피를 마시러 가고, 쉬러 가는 것이지만 그를 보러 가는 게 맞는 말이다. 이상하게 자꾸 끌리는 내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벌써 한 달이 되어 가지만 그는 나를 모르는 것 같았다. 몰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일도 자주 오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좋아서 마시듯이 내가 좋아서 이곳에 오는 것이니까.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지만 절대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나를 모르는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서 그를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순간순간을 나는 즐기고 싶으니까.
그날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야근을 하고, 지하철로 가다가 일부러 그곳을 들렀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약간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항상 창 가까이 앉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는 게 재미있다. 커피를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앞자리에 앉는다. 나는 놀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 사람도 말이 없다. 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쪽지를 주고 간다. 뭐지? 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내 손이 파르르 떨린다. 하얀색 쪽지. 펼쳤다.
‘그때 클럽에서 만난 분 맞죠? 확실한 지 자신이 없었는데 그때 보았던 머리핀을 했네요. 저를 보는 눈빛만으로는 자신할 수 없었거든요. 혹시 맞다면, 오늘 클럽에서 다시 만날까요? 1시에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