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분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날리고 목덜미로 차가운 기운을 남긴다. 놀랄 정도는 아니다. 약간 시원하면서 차갑다는 느낌이 든다.
바람으로 전해지는 계절의 변화. 낙엽들이 떨어지고 있다. 색색깔의 낙엽들. 낙엽들 사이로 아직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코스모스가 처량하다.
그들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나는 강변을 달린다. 멀리 강가에서는 물결의 흔들림이 미세하게 느껴진다. 달리는 내 다리에 기운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경보와 달리기의 중간쯤이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데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슬쩍 그리고 재빠르게 훑어본다. 내가 달리는 시간이 어중간하다. 강변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천천히 걷고 있는 할머니들, 얘기로 꽃을 피우며 걷고 있는 두 아주머니. 뭔 얘기가 저리도 많을까. 자전거를 탄 채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 다른 사람과 부딪칠까 걱정스럽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쌩쌩 지나가는 젊은 여자,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탄다.
주말 오후가 갖는 풍경. 나는 달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삶을 그려보기도 하고 오후에 내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한다.
오후에 있을 그와의 만남을 그려본다. 아직은 즐겁지만 언제 가는 끝날 것이다. 그 끝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그도.
운동 후 샤워를 하고 얼굴에 바를 팩을 만들면서 사과를 먹었다. 사과의 마지막 조각을 먹고 얼굴에 팩을 발랐다. 느긋하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켰다. 이곳저곳 채널을 돌리다 ‘정글의 법칙’에서 멈추었다. 야생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부러움을 느끼고 있는가. 멋진 파도와 짙푸른 바다를 보면 무척 부럽다. 말보다는 몸으로 표현하고 부딪치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김병만도 이제 힘겨울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몸. 육체. 나는 이제 그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기 위해 집을 나설 것이다. 거의 빠지지 않고 우리는 만나고 있다. 우리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만나고 있다. 이게 지겨워지면 우리의 관계는 끝이다. 우리가 만나는 장소는 특별한 경우를 빼곤 거의 변함이 없다. 특별한 경우란 우리 중 누군가 어디에서 만나고 싶다고 장소를 정하면 바뀌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매번 같은 곳이다.
약속 한 시간보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은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가 레스토랑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내가 다가갈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그는 나를 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나도 따라 미소 지었다.
면도를 깔끔하게 하고 머리를 정리한 모습이다. 오늘은 캐주얼하게 입고 있네. 까만색 폴라 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재킷은 옆 의자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밤색 원피스를 입었다. 목에는 연한 노란색 스카프를 둘렀다. 의자에 앉으면서 재킷을 벗었다.
조금 있으니 그가 미리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와인을 마셨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취해 가고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올라가자고 했다. 레스토랑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8층으로 가는 길은 속도만큼 짜릿함을 주었다. 808호. 문이 열리고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기 무섭게 그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손으로 나를 훑어 내렸다. 그의 손길에 나는 또 아스라이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나를 으스러지게 안았다.
“오늘은 같이 샤워하자.”
낮은 듯 감미로운 그의 음성이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거친 듯 자연스럽다. 나는 그의 옷을 벗기고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청바지를 벗기니 그의 속옷이 보였다. 파란 줄무늬 삼각팬티. 삼각팬티는 곧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팬티를 벗기고 그의 물건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의 물을 틀어 놓고 우리는 양치질을 했다. 양치 후 세수를 하고 나니 어느새 샤워기가 내 등을 타고 내렸다. 잠시 후 내 온몸과 그의 온몸은 거품으로 뽀글뽀글 해졌다. 우리는 그 상태로 서로의 몸과 몸을 비볐다. 미끌미끌 재미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장난을 치다가 우리는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왔다.
방안에는 그의 핸드폰에서 들리는 음악과 연한 무드 조명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서로를 열심히 즐겼다. 그의 핸드폰에서 나오는 음악은 우리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는 탁월한 역할을 했다. 처음엔 음악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제는 음악에 따라 내가 움직이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음악에 내 몸이 반응함을 느낀다. 음악은 처음엔 나긋나긋 조용한 선율의 피아노이다. 다음엔 조금씩 높아지는 현악기가 등장한다. 어떤 때에는 록 음악이 나오기도 한다. 서로가 절정에서 환희를 맛보고 나면 조용한 음악이 다시 흐른다. 우리의 감정을 추슬러 주는 것 같다. 우리는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누워서 조용히 음악을 듣는다. 어떤 때에는 내가, 어떤 때에는 그가 먼저 잠이 들기도 한다. 잠들지 못한 사람은 방을 나선다. 아침을 함께 맞이한 적은 아직 없다.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한 적은 없는데 이상하게 그런 식으로 되어 버렸다. 그게 서로에게 편하니까 그렇게 되었다.
눈을 뜨니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다시 현실의 세계로 나온 느낌이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걸 보니 꽤 늦은 시간인 모양이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11시.
마트에서 먹을 것을 사고 DVD 몇 편을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이 주는 즐거움은 이런 것이리라.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뜨거운 라면과 샐러드와 맥주로 오늘을 채울 것이다. 먹고 마시고 영화를 보다가 잠이 오면 자면 되는 것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로움이 참 좋다.
월요일 아침은 활기가 넘치면서도 얼굴에 지친 듯 피곤한 기색들이 느껴진다. 쉬고 나면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줄어드는 건 왜일까. 매일 보는 얼굴들. 서로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자리에서 그날의 일을 체크하기 바쁘다. 아직은 다들 여유가 조금씩은 있다. 월초이기 때문이다. 각자 해야 할 인터뷰 당사자와 약속 날짜를 잡고 사진 기자와 시간을 체크한다.
우리 사무실에는 취재기자 못지않게 사진기자가 많다.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는 거의 대부분 한 조로 움직인다. 나 역시 사진기자와 대부분 동행을 하기는 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건이나 기사가 아니면 혼자 움직인다. 초보 사진기자보다는 내가 찍는 사진이 낫고, 둘 보다는 혼자가 일을 하기에 수월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잘 찍는 기자를 데리고 가지만 서로 시간이 겹친다든지 장소가 너무 멀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동수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뭔 일이 있나? 동수의 자리와 내 자리는 거의 대각선으로 놓여 있어서 잘 보였다. 또한 동수는 내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사진을 아주 멋지게 찍는 몇 안 되는 기자이다. 일에 대한 사명감 또한 남다르다. 동수는 우리 사무실에서 꽤 인기가 있다. 키도 훤칠하니 크고 생긴 것도 준수하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얼굴에 배치된 구도 역시 적절하다. 술을 잘 마시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또한 좋다. 근데 이상하게 애인이 없다. 아니, 애인이 있기는 했었다. 잠시 바람처럼 왔다가 그렇게 사라졌다. 동수가 차는 게 아니라 항상 차였다. 바보같이.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애인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 같아 보이고, 혼자 잘 지냈다. 사무실 후배들과도 사이가 좋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누어 준다. 요즘 보기 드물게 착해서 그런가? 그런데 오늘은 표정이 어째 평소와 좀 다르다.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동수야, 오늘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나는 그의 옆에서 무심한 듯 슬쩍 건드리며 물었다. 그는 잠시 나를 보는 듯하더니 말이 없다. 어? 왜 이러지?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좀 있다 점심이나 같이 먹자…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
사진을 정리하면서 혼잣말하듯이 힘없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대답을 못하고 그를 빤히 보았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은 오후 일정만 소화하면 끝이다. 오후에 짧은 인터뷰 하나 하고 바로 퇴근할 예정이다.
월말이 되면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바쁘기 전에 주어진 이 여유를 한껏 즐겨야 한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자료 수집을 위해 서점에 들를 것이다. 새로운 인물이나 떠오르는 인물을 찾아보고, 다른 잡지사에는 어떤 인물들이 나왔는지 볼 것이다. 매번 특종을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잡지사와 겹치지 않으면서 좀 더 참신하고 획기적인 인물을 찾아야 한다.
동수는 오늘도 어김없이 국밥집을 선택했다.
“야, 맨날 먹는 국밥 지겹지도 않니?”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시켰다. 국밥 두 그릇과 수육 한 접시가 나왔다. 그는 배가 아주 고픈 사람처럼 연신 퍼 먹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나도 조용히 밥을 먹으면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나한테 화가 난 것인가. 그럴 일이 뭐가 있지? 내가 실수한 게 있나? 없는데. 나 혼자 온갖 추측을 해 가며 밥을 먹었다.
이렇게 조용히 밥을 먹은 적이 거의 없기에 나는 괜히 초조해졌다. 뭐지? 나는 수육 몇 점을 먹고 국밥을 조금 먹은 후에 수저를 놓았다. 많이 먹었다가는 소화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분명 뭔가 있어. 재가 저러는 경우는 뭔가 사건이 있을 때가 아니면 거의 없어. 근데 그게 뭐지? 특종을 잡았나? 아냐. 특종을 잡았으면 저런 표정이 아니지. 이건 좋지 않은 사건이야.
내가 수저를 놓자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안 먹어?”
“야, 니 표정이 이런데… 밥이 넘어가니? …뭔 일 있지? 그렇지? 빨리 말해.”
나는 그를 보며 다그쳤다. 사실은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그러자 그는 다 먹었는지 휴지로 입을 닦더니 툭 뱉었다.
“나 다른 회사로 옮겨.”
나는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멍했다.
“뭐? 회사를 옮긴다고? 왜?”
“내가 자주 얘기했잖아. 나는 제대로 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패션 쪽이 아닌 보도 쪽을 원한다고. 마침 그쪽에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고, 결정을 했어. 국장님께 이미 보고 했어.”
나는 그를 보며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다른 회사로 간다고? 맞는 말이다. 그는 자주 말했었다. 패션 쪽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시사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언제 가는데?”
애써 침착한 척하며 물었다.
“이번 주까지 정리하고 가기로 했어.”
“그…래, 항상 가고 싶어 했지…”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함께 오랫동안 있어서 그런가? 점심을 먹은 후 커피를 마시고 나는 인터뷰를 위한 자리로, 동수는 사무실로 갔다.
오늘 인터뷰는 우리 회사에 매달 광고를 넣고 있는 기업인 인터뷰이다. 기사를 위한 인터뷰가 아니라 광고 재계약을 하면서 기존의 화보를 그대로 낼 것인지 아니면 바꿀 것인지에 대한 얘기이다. 이 회사는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는 데가 아니기에 수월하게 재계약했다. 계약을 하면서 그 회사의 상품을 하나 더 내 보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일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내 머리는 어지러웠다. 온통 동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회사를 옮기는 건 당연하다. 잘 된 일이라고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하는데 영영 보지 못할 사람처럼 허전한 이 느낌은 뭐지? 마치 오랜 애인과 이별을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중학교 동기이다. 서로 다른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동아리 활동 때문에 알게 되었다. 다른 여러 학교와 함께 하는 동아리라 재미있었다. 매주 토요일 만나서 봉사활동을 다녔다. 노인정, 병원, 요양원, 보육원 등에서 봉사를 하였다. 봉사활동은 힘이 들었고 때론 지치기도 했지만, 내 힘을 보태어 줌으로써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떡볶이와 어묵으로 배를 채우며 즐거워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함께 다녔다. 물론 전공은 서로 달랐지만 우리는 자주 만났다. 서로가 힘들면 힘이 되어 주고 애인이 필요하면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동수는 내게 있어서 편안한 친구이다. 있는 것 만으로 힘이 되는 친구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다 받아 주는 친구이다. 아, 맞다. 동수는 국수를 아주 맛나게 해 준다. 고명으로 뭐 별거 있는 것도 아닌데 아주 맛나다. 아마 국물이 맛있어서 그럴 것이다. 처음으로 동수가 만들어 준 국수를 먹은 날이 생각난다.
겨울이었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얼마 남기지 않을 즈음, 나는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다. 매번 내가 헤어지자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별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아픈 마음에 동수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동수는 가만히 듣고 있더니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쫄래쫄래 따라갔다. 동수는 능숙하게 육수를 만들었다. 멸치와 다시마, 새우, 양파 등을 넣어 진하게 우려냈다. 그리고 국수를 삶아서 작은 밥상에 김치를 내놓았다. 자취방에 앉아서 동수가 끓여준 국수를 먹으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동수가 음식을 잘 만든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국수를 먹으며, “진짜 맛있다” 하면서 연신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동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동수가 회사를 떠나서 섭섭하고 아쉽지만 잘 되라는 의미에서 멋진 뒤풀이를 마련했다.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술잔을 들었다. 배가 부를 즈음 우리는 각자 준비한 선물을 주면서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1차를 끝내고 몇 명은 가고, 다시 몇 명은 2차로 호프집으로 갔다. 과일 안주와 맥주를 마셨다. 2차에선 동수의 후배가 주로 얘기를 했다. 동수의 빈자리를 채워야 할 사람이니 부담감이 있을 것이다. 그런 후배에게 동수는 이것저것 알려주고 잘할 수 있다는 격려를 하였다. 내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술이 빨리 취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중간에 집으로 왔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출근시간이었다. 어제 동수의 송별회로 술을 너무 마신 탓인지 머리가 약간 지끈거렸다. 지하철에서 자세를 잡고 눈을 감았다. 목적지를 알리는 멘트에 눈을 떴다. 잠시 눈을 감은 것뿐인데 한결 개운한 느낌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부장이 불렀다.
“진 과장, 회의실에서 좀 볼까?”
“예. 알겠습니다.”
나는 체크하고 있던 일정표를 접어두고 수첩을 들고 회의실로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부장은 본론부터 꺼냈다.
“정기자가 나가는데 새로 뽑지 않아도 되려나? 자네는 어찌 생각해?”
새로운 기자를 뽑을 계획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의 요지는 뭐지? 나한테 정기자의 후임을 다시 교육시키라는 말인가. 멍한 정신을 추슬렀다.
“ … 이기자가 정기자의 자리를 대신해도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요. 부장님은 어떠신데요?”
이기자 말고 다른 기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어 물었다.
“이기자가 못한다는 게 아니고……”
“……”
부장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얼마나 뜸을 들였을까.
“솔직하게 말해서 정기자의 자리를 이기자가 채울 수는 없잖아. 사진도 아직 마음에 들지 않고 괜찮은 기사를 물어 올 능력도 부족하고……, 좀 귀찮기는 하겠지만 진 과장이 이기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 좀 시키는 건 어떨까 하는데”
교육을 시키라고 하면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인지 모두 다 안다. 이기자는 신참이 아니기에 자기 고집이 있을 텐데 그걸 꺾고 교육을 시키라고? 이건 말이 안 된다. 내 속에서는 부글거리고 있는데 못하겠다는 말이 왜 입에서 나오지를 않는 것일까. 대답을 하지 않는 나를 보는 부장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어조로,
“부장님, … 이기자는 신참이 아니잖아요 … ”
나는 힘겹게 말하고 다시 숨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일은 제가 처리하고 이기자가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줘 보는 건 어떨까요. 지켜보다가 … 많이 부족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부장은 내 말에 답이 없었다. 썩 내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러자고 했다. 내 자리로 돌아왔지만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커피를 한 잔 만들어 사무실 밖의 휴게실로 갔다. 이미 정기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옆에 섰다. 우리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서로의 머리엔 다른 생각들이 들어차 있을 것이다. 서로를 위해 해줄 말은 없어 보였다. 곁에 그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든든한 힘이 되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차를 마시며 조용히 먼 곳을 바라보다가 내려왔다. 좀 전 보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기자는 현재 3년 차이다. 사진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탁월한 것도 아니다. 어떤 때에는 아주 멋진 그림이 나왔다가 어떤 때에는 형편없는 작품들이 생긴다. 기복이 있는 편이다. 기복을 줄여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며칠만이라도 이기자의 스케줄에 정기자를 붙이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정기자는 투덜거릴 것이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정기자도 알기에 성가시지만 해 줄 것이다. 같은 인터뷰 대상에 대한 탐구 사진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서 이기자가 자신의 문제를 찾으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다음 주는 나와 다녀야 할 것이다. 나는 정기자와 이기자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정기자에게는 많이 보여주려고 하기보다 핵심을 보는 눈을 가르쳐주라고 했다. 이기자에게는 정기자만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제대로 파악하라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이기자가 얼마큼 배울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짧은 시간이기에 더 절실하게 배우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기자와 정기자가 함께 한 사흘. 출력한 사진을 보면서 이기자의 생각을 물었다. 이기자의 얼굴은 꽤 심각해 보였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같은 구도에서 찍은 사진임에도 얼굴표정이나 그림자가 달랐다. 정기자의 사진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기자의 사진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것이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을 조사해야 한다. 많이 알고 있고, 자료가 풍성해야 질문이 많이 생긴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사전 배경은 선입견을 만들 수도 있다. 직접 만났을 때 그런 선입견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기사를 작성하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한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뿌듯함까지 가지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사진기자와 함께 가는 게 유리하다. 인터뷰하는 동안 내가 가진 느낌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으니까. 사진기자랑 함께 가느냐 아니냐는 사전 준비단계에서 결정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기자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다. 아는 게 중요하다. 기대감이 생겼다. 회사라는 게 어찌 보면 웃긴다. 사람이 빠져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가니 말이다. 정기자가 나가고 며칠간은 서로 허전함에 정기자를 그리워하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정기자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뭔가 빠진 듯 허전했지만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일은 해야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주말이 되었다. 그 사람과의 약속이 다가오는데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날 생각을 하면 온몸이 살아나듯 부풀어 올랐는데……. 나는 문자를 했다. 이번 주는 안될 것 같다고. 그 사람은 알았다고 했다.
오롯이 내 몫으로 남겨진 주말. 이번 주는 집에서 뒹굴거리며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늦잠을 잔 토요일, 운동을 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일어나 물 한잔 마신 게 전부였다. 이불 위에서 몸을 굴리며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동수에게서 문자나 전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하지 않은 것은 동수를 위해서였다. 새로 옮긴 직장에 적응해야 하니까 내 문자나 전화가 부담이 될까 봐하지 않은 것이었다. 내 배려는 그렇다 치고, 연락 없이 조용한 것이 괜히 기분 나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 적응하고 있겠지 하다가도 조금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주말에 동수는 뭐 할까. 괜히 궁금해졌다.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가 하지 않기로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내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12시를 넘기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뭘 먹을까. 딱히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냉장고에 뭐가 들었지? 냉장고 문을 열고 재료들을 봐도 딱히 해 먹을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왔다. 동수였다. 시장을 보다가 내 생각이 났다면서 우리 집에 온다는 전화였다. 나는 대충 집을 청소하고 세수를 했다. 시장을 봤다고? 배고픔에 기대감이 생겼다.
동수는 봉지 봉지 뭔가를 잔뜩 들고 왔다.
“뭘 이렇게 많이 산 거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의 톤이 높고 밝았다. 그런 내 상태를 알아차린 듯
“너, 지금까지 쫄쫄 굶고 있었지?”
동수는 다 안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시장에 갔더니 낙지가 싱싱해 보이길래 좀 샀어. 혼자 먹기엔 그래서 가져왔지. 낙지볶음이랑 국수 만들어서 비벼 먹자.”
“와~~~~ ”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고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격하게 반겼다. 동수가 낙지를 다듬는 동안 나는 야채를 씻고 국수 삶을 물을 끓였다. 내가 국수를 삶아서 찬물에 헹구고 있을 때 동수는 양념장을 만들어 낙지볶음을 하였다. 상을 펴고 수저를 놓으며 기분이 좋았다. 낙지볶음이 완성되어 상 위에 올려졌을 때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그런 나를 보며 동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는 축제라도 벌이듯이 캔을 부딪치며 마셨다. 매콤한 낙지와 잘 비벼진 국수는 술술 넘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일주일 내내 연락이 없어서 걱정 반 실망 반 하고 있-었-네-요.”
매워진 입을 맥주로 헹구며 약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동수는 알 수 없는 웃음만 날리며 먹기만 했다. 캔 하나로 시작한 게 어느새 빈 캔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배부름에, 알코올에 취해서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이유 없이 바보처럼 웃었다. 우리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쉬었다. 그동안 있었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수는 지나가는 말로 내게 말했다.
“나는 네가 필요한데, 너는 언제쯤 내가 필요할까? 친구가 아닌 남자로 말이야.”
“야 또 그 얘기야? …… 그래, 이번엔 물어보자. 왜 내가 필요한데?”
“…….”
“좋아. 내 몸이 필요한 거야?”
내 말에 동수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화난 눈빛에서 나를 향한 애정이 보였다. 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일까.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을까. 그가 나를 진심으로 대할수록 나는 두려워졌다. 그러다 내가 버려질까 봐.
내 삶은 버림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아버지로부터, 다음엔 엄마로부터. 아버지는 중학교 때 엄마와 이혼하면서 나를 버렸다. 나에게 그 어떤 식으로든 연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우리 모녀를 버렸을 때 엄마가 있어서 견딜만했다. 엄마는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의무감으로 키우는 양육자의 자세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자 엄마는 나에게 독립하라고 했다. 독립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연락이 왔다. 독립하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엄마의 전화였다. 병원이었다. 엄마는 병원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마셔 보고, 여행을 다니고, 일에 파묻혀 봤다. 달래 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괜찮았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허전함이 살짝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임신에 대한 불안감이 왔다. 피임 시술을 받았다. 원치 않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주는 즐거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많은 남자들을 만나 관계를 했지만 허전함을 채울 수는 없었다. 하룻밤이 주는 묘한 설렘은 있었다. 서로 육체를 섞고 나면 설렘은 사라졌다. 그러다 그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내게 몸이 주는 즐거움을 알려 주었다. 나도 모르게 그가 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렇게 우리는 정기적인 만남으로 서로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육체만 원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가능했다.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지 않고, 기대를 버리고, 그 어떤 마음도 품지 않았다. 오로지 몸에만 집중했다. 어떨 때는 그런 내가 짐승처럼 느껴지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를 만나는 동안 남자에 대한 궁금함이나 허전함이 사라졌다.
동수가 내게 이상한 형태의 프러포즈를 하는 건 몇 년 전부터였다. 어떤 때는 지나가는 말로, 어떤 때는 심각하게, 어떤 때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동수의 말을 지나가는 소리로 흘러 보냈다.
그런데 이제는 안 될 것 같았다. 동수가 내 비밀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놀라 뒤로 자빠지지 않을까.
나는 오래된 친구를 잃을 각오를 했다.
“너 내 비밀 알아?”
“어? 뭔 소리야?”
“나에 대해 얼마나 아냐고?”
순진한 동수는 나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학창 시절의 나를 전부인양 아는 건 아니겠지?
“너에 대해 뭘 알아야 하는데?”
“좋아. 네가 정확하게 원하는 게 뭐야? 애인? 결혼?”
“내가 결혼하자고 하면 할 거야?”
드디어 본론이 나왔네. 매번 둘러 둘러서 말하더니 오늘은 다르네.
“아니.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하냐고? ……”
그는 나를 가만히 보면서 뭔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너에 대한 비밀? ……알고 있어.”
“… 안다고? ……내가 주말이 되면 남자랑 호텔에서 뒹군다는 걸 안다고?”
놀란 나와 다르게 동수는 평온해 보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동수가 내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아니지. 알고도 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내가 괜찮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동수는 말이 없다. 맥주를 마시고 한참을 있더니,
“네가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으니까. … 한때 나도 그런 적이 었었거든.”
나는 동수를 이해할 수 없다. 이건 내가 알던 동수가 아니었다.
“나를 이해한다고? 어떻게?”
나도 모르게 동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가 내 비밀을 안다는 것과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줄까?”
지금 이 상황에 저런 말이 나오나.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맥주만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수는 작정한 듯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엔 누나와 나 둘이야. 나이 차이는 좀 많이 나지. 중학교에 갈 때까지 나는 우리 집의 비밀을 몰랐어. 누나는 항상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어. 다정하고, 뭐든 챙겨주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뭔가로 둘이 심하게 싸웠어. 누나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처음 봤어. 나를 어쩌지 못해 혼자 화를 내면서 툭 던진 말이, ‘입양된 주제에.’ 였어. 그렇게 말하고 누나는 가 버렸어.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거든. 나는 처음엔 누나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았어. 생각이 없었거든.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입양’이라는 말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 우리가 함께 다녔던 보육원 기억나니? 내가 봉사활동에 들어간 이유는 보육원에 가서 내 기록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어. 누나가 한 말이 진실이 아닐 것이라는 마음과 진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말이야.”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동수를 보며, 중학생인 그가 느꼈을 상실감과 허전함을 어찌 감당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했다.
“그래서 기록을 찾았어?”
“찾았지. 없기를 바랐는 데 있더라. 뭐 어찌 보면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찾아진 거라고 봐야지. 보육원 원장이 나를 알아본 거지. 어릴 때 얼굴이 그대로였나 봐. 두 살 때 입양되었다고 하더라. 나를 낳은 사람은 미혼모였는데 몸이 좋지 않아 죽었다고 했어. 원장은 내 생활을 묻더라고. 별일 없이 잘 지낸다고 했어. 원장은 건강하게 자라라고 하더라.”
동수의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 동수는 나를 보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며 자신의 얘기를 계속했다.
“내가 입양된 걸 알고도 나는 평상시처럼 살았어. 부모님에게 왜 나를 입양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못 물었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까 봐 겁이 났거든. 대신에 누나를 찾아갔어. 누나는 알 수도 있으니까. 누나를 낳고 한참이 지났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엄마 자궁에 물혹이 생겼는데 위치가 좋지 않았던가 봐. 물혹이 계속 자라면서 출혈이 심해지고 결국 제거수술을 하면서 아기를 더 이상 가지지 않는 게 좋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데. ……처음 입양을 말한 건 아버지가 먼저였고, 엄마는 반대했는데 보육원에 와서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바뀌어서 나를 입양하게 되었다고 하더라.”
동수가 입양된 아이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누나하고는 원래 사이가 안 좋았어?”
“아니. 누나는 나한테 잘해주었어. 나도 누나를 잘 따랐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이상한 고집이 좀 있나 봐. 누나가 싫다는데 내가 부득부득 우기니까 누나가 화가 많이 났어.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던 거야. 내가 다시 누나를 찾아갔을 때 누나가 미안하다고 하더라.”
동수의 말을 들으며 중학교 때의 모습을 생각해 봤다. 당시 동수는 평범한 아이였고 고민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때 당시엔 괜찮았어. 진실을 알았지만 어찌 보면 실감이 나지 않았던 건지 별 감흥이 없더라고.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많이 힘들었어. 제일 중요한 시기였는데 내 성적이 엉망인 이유야. 그때 엄청 방황했지. 껄렁한 애들과 어울리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나쁜 짓 하고. 아마 그때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지.”
“야 그래도 대학에 들어간 거 보니 용타. 그렇게 방황을 하면서 말이야.”
“그게, 입시를 한 두 달 남기고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거든. 엉망으로 취했을 거야. 보통은 술을 깨고 들어갔는데 그날은 너무 많이 마신거지. 집에 갔더니 부모님이 좀 놀라더라. 술에 취한 모습을 처음 본 거지. 아버지는 나를 부축해서 방에 눕혀줬지. 그때 내가 술김에 입양얘기를 한 모양이야. 나는 기억에 없어. 며칠 후에 아버지가 둘이 어디 좀 가자고 하더라고. 나를 낳은 분이 있는 곳이었어. 나무에 이름표가 붙어 있더라고. 아버지는 나를 키우면서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다고 얘기했어. 엄마도 몸이 좋지 않았는데 내가 잘 웃고 잘 놀아서 건강해졌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내 손을 잡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났는지. 그곳에서 펑펑 울었어. 아버지도 함께 울었어.”
“네 부모님, 참 좋으신 분들이구나. 부럽다. 울 아버지는 이혼하고 나를 한 번도 찾지 않는데 말이야.”
내 말에 동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너,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힘들어할 것 같았는데 멀쩡하더라. 자립심이 강한 건 알았지만 잘 지내니 다행이라는 여겼어. 근데 우연찮게 네가 그 사람을 만나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생각했어. 네 외로움과 헛헛함을 그 사람을 통해 해소시키고 있는 거라고. 내가 해소시켜 줄 수 없어서 속상했지만 괜찮았어. 어떤 식으로든 풀면 되는 거니까. ……그런다고 네 외로움이 채워지지는 않잖아.”
동수는 내 정곡을 찔렀다. 아팠지만 이상하게 시원했다. 내가 지닌 비밀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내 옆에 있는 그는 동수가 맞는가. 내가 알던 친구가 맞나.
그날 이후, 우리는 예전과 달리 조금 진지해지기로 했다. 나의 아픔을 알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 모든 걸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내 마음은 동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의 모습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