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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이 Jun 25. 2023

수북하게 펼쳐진 도시락

 - 여섯 개의 도시락

인터넷에서 가져 온 사진, 가끔 도시락에 계란이 밥 사이에 숨겨져 있기도 했다. ㅎ ㅎ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어느 아침, 평상시처럼 아침을 후딱 먹고 도시락을 챙기려고 부엌문을 열었는데 놀라운 장면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엌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락. 무슨 전시회 마냥 하얀 밥들이 펼쳐져 있었다. 여섯 개의 도시락에 밥이 담겨 있고, 밥에서 나오는 김을 빼려고 뚜껑이 열린 상태였다. 


 아, 그때 나는 알았다. 진귀한 장면만큼 엄마의 수고로움이 얼마나 큰지….


 4남매가 많구나. 우리 식구가 많구나. 할머니랑 함께 살았으니까 일곱의 식구는 많은 것이었다. 4남매가 많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는데 그때를 기점으로 많음을 실감했다.

 

 그때의 엄마는 엄마 인생에서 제일 힘들고 바빴을 것이다. 아침에 적어도 5시에 일어나서 식구들 아침과 도시락을 챙기고 일을 하러 나갔다. 전업주부였지만 엄마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밖에서 고되게 일을 하고 집에 오면 다시 집안일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할머니가 도와주고 있었지만 엄마의 일감은 줄지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두 개(점심과 저녁), 동생들이 하나씩, 그리고 일을 하러 다녔던 엄마의 도시락.


 밥을 먹을 때나 도시락을 먹을 때 반찬 투정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 그날 아침 부엌을 본 이후 내 마음은 감사함과 죄송함으로 복잡 미묘했다. 나는 도시락 두 개에 반찬통 세 개를 챙겨 다녔다. 왜냐하면 밥을 먹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친구들과 함께 먹으면 나중에 내가 먹을 반찬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밥보다 반찬을 더 많이 먹는 습관으로 엄마의 수고로움이 더해졌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우리 집 형편이 제일 힘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 게 고등학생 2명, 중학생과 초등학생이 있었으니 말로 해서 뭐 하겠는가. 지금과 달리 중학교부터 등록금이며 책값이 고스란히 나가야 했기에 주부였던 엄마까지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 덕분에 우리 4남매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면서 친구들과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점심 메뉴나 맛 때문에 도시락을 싸 오는 건 어떨까 하는 말이 나왔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얘기를 했더니, 

 “아이고, 나는 이제 못한다. 싸고 싶으면 니가 싸가라.”

 그 말에  그때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 많은 도시락을 준비하던 엄마도 힘들었음을. 당연한 얘기이다. 나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작은 애가 고등학생일 때 학교 급식소의 공사로 일주일간 도시락을 싸야 했다. 짧은 일주일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도시락 반찬을 다르게 하면서 맛있게 해 주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반찬 솜씨가 없는 티를 내면 안 되는 내 노력을 알았던 것인지 어떤지 다행히 불만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걸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리사랑은 쉬운데 치사랑은 어렵다. 머리와 마음으로는 안다.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는 잘 되지 않는다. 도시락을 생각하며 오늘의 나를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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