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담 Apr 15. 2023

이야기의 시작, 마니또 -2-

이렇게 관계가 진전될 줄이야

마니또를 다시 뽑을 때 아내도 바구니에 손을 넣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냥 집히는대로 뽑은 게 아니었습니다. 손으로 제비를 휘휘 젓다가 마침내 하나가 손에 집혀서 그걸 뽑으려 했죠. 그런데 그걸 뽑으려던 찰나, 바로 옆에 있던 제비가 아내에 손에 걸렸습니다. 걸린 느낌을 받은 아내는 원래 있던 제비를 놓고 옆에 있던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는 제비를 펼쳐 누구의 이름이 적혀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어?'


제비를 뽑은 아내는 당황했었습니다. 손에 걸렸던 그 종이에는 다름 아닌 제 이름이 적혀있었거든요. 마니또 이벤트를 다시 시작하자마자 서로의 역할이 뒤바뀐 것이었습니다.


당황하는 아내의 등뒤로 한 동아리 선배가 있었는데, 아내는 그 선배에게 종이를 보여주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며 이야기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본 선배는 짧게 한마디하고 말았습니다.


잘 챙겨줘~


선배의 대답을 들은 아내는 화들짝 놀라며 "아 뭘 잘 챙겨줘요~!?"라고 말했지만, 선배는 "그냥 받은만큼 챙겨주면 되지 뭐"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쨌든 아내는 제 마니또가 되었단 사실 때문에 일순간 번뇌가 생겨났습니다. 자기가 전래동화에 나오는 은혜갚은 제비나 호랑이 같은 캐릭터는 아니라지만, 어쨌든 받은건 사실이니 대체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난 것이죠.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아내는 저에 대한 첫 마니또 활동을 실행했습니다. 제가 동아리방에 없던 틈에 도넛가게에서 도넛 한박스를 사들고서 동아리방에 놓고 갔던 것이죠.


아내가 저에게 주려고 놓고 간 도넛 박스. 여기엔 비밀이 하나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아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겪었는데요, 바로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 박스 위에 '♡동영♡'이라고 썼던 것입니다. 아내가 이걸 놓으려고 동아리방에 갔을 때 다른 동아리 회원 네 명이 같이 있었는데요, 아내가 이걸 놓고 나간 뒤에 몰래 저렇게 적어놓고 마치 아내가 적은 것처럼 위장했던 것이죠.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제가 제 SNS에 이 사진과 함께 마니또에 대한 감사를 표시한 게시물을 올리고 난 뒤였습니다. 당시 아내는 사진 속의 자기가 적지도 않은 글씨를 보자마자 너무 다급한 나머지 육성으로 '나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하고 맙니다. 마니또로서 저한테 격려문자를 보낼 때 실수로 발신번호를 지우지 않은 채 보냈던 것이죠. 저도 문자를 받자마자 '아 얘가 내 마니또구나'라는 사실을 눈치챘습니다. 누가봐도 마니또로서 보내는 문자인 게 티가 났거든요. 정체가 대번에 들통난 아내는 다시 문자를 보내 저한테 사실을 실토했고, 저는 답장을 보내며 웃음을 터뜨렸었죠.


그렇게 서로의 마니또 활동은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부의 인연은 이제 막 시작이었죠.

매거진의 이전글 이야기의 시작, 마니또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