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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 Apr 16. 2023

아무튼 같이 영화를 봤습니다! -1-

제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요

아내에게 도넛 한 박스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잠깐 쉬고자 동아리방을 향했는데, 마침 선배 두 명과 동기 한 명이 같이 자리를 차지했었죠. 그런데 별 생각 없이 그냥 쉬고 있던 제게 선배와 동기들이 계속 아내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했었습니다. 아내를 제외한 모든 동아리 회원이 눈치채고 있는 상황에서 저와 아내의 '썸'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는 회원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죠.


하지만 질문을 받았던 저도 사실 명쾌하게 답변하기 어려웠었습니다. 서로가 마니또로서 다른 사람에 비하면 고가의 선물을 주고받긴 했었지만, 그건 제가 먼저 건넨 것에 대한 답례 정도로 보는 게 더 맞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제가 개인 카톡을 매일 주고받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썸'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있었습니다. 썸타는 관계라고 정의하기에는 서로 간에 별달리 마음을 주고 받는 말이나 행동을 하진 않았거든요.


그러나 이토록 애매한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뭐가 그리 재밌었던지, 선배들과 동기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제가 얘기를 하면 할수록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마냥 집중해서 듣는 수준을 넘어서, 제 얘기에 대해서 '초등학생들 연애를 보는 것 같다'는 등의 피드백 전달, 심지어 저를 앞에 두고서 제 얘기를 토대로 저와 아내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하여 서로 간의 심층토의까지 이어질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선배 한 명은 이 얘기에 참여하던 도중 다음 일정까지 10분 밖에 안 남은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그대로 남을지 자리를 뜰지를 고민하다가 "좀만 더 듣고 가자"라며 그대로 남는 선택을 하기에 이를 정도였죠.


그렇게 한참 얘기를 이어가던 중, 동기가 갑자기 제게 데이트 신청을 해보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저는 매우 당황했었습니다. 커플이 되기도 전부터 데이트를 제안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해보질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런 제 생각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선배와 동기는 자신들의 배경지식을 총동원해서 최적의 데이트 코스를 만들어내는 것에 열중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집단지성의 도움을 받아 다음의 데이트 코스를 계획하기에 이릅니다.


1단계.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본다


2단계. 영화가 끝나면 아내와 함께 맛있는 한 끼를 먹으러 간다


3단계. 기숙사로 돌아가는 아내를 바래다준다


저는 그렇게 계획을 완성하고 다음 날 아내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실없는 카톡을 보냅니다. 그리고 아내와 아무렇지 않은 듯한 카톡을 주고 받다가 본론에 들어갑니다.


현충일에 영화 같이 안 볼래?

마침 그 주에는 공휴일인 '현충일'이 평일이었기 때문에 쉴 수 있는 날이 하루가 더 있었고, 저는 그 날을 노려 제안을 했던 것이죠. 그 순간 제 마음은 수많은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혹시나 저의 데이트 제안이 거절되지는 않을까하는 불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 제안을 받은 아내의 답은 생각보다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래, 같이 보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아내는 제가 진짜로 고백을 하기 전까지는 저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친구와 영화 한 편 보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죠. (같은 방에 살던 룸메이트 언니들도 '이건 애정표현이다'라며 심상치 않게 받아들였었는데도 말이죠.) 하지만 그 당시의 제게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을 뿐이었습니다. 아내의 답장을 확인한 저는 답장을 보내 시간과 장소를 알려줬습니다. 이미 최대치로 부풀어버린 기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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