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담 Apr 18. 2023

아무튼 같이 영화를 봤습니다! -2-

엉망진창이었던 실전, 그래도 해냈습니다

현충일 아침이 밝고, 저와 아내는 서서히 서로 만날 준비를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로 만남을 준비하는 태도가 달랐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여자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면, 아내는 정말로 '친한 남사친과 영화 한 편 보러 나들이 가는 마음'으로 준비했던 것이죠.


당연히 약속 장소에는 제가 한참 먼저 도착했습니다. 점수를 얻기 위해서 당연히 갖춰야 할 예의였죠. 하지만 그 때의 저는 '한 가지 중요한 예절'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영화, 그것도 흥행하는 영화는 예매가 필수란 예절을 말이죠. 당초 저는 아내에게 이 영화를 보기로 제안했었습니다.



2012년 극장가의 흥행작 중 하나였던 '어벤져스'였습니다. 너도나도 입을 모아 재밌다는 소리를 하길래 '저 영화면 같이 볼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고서 제안했던 것이었죠. 그러나 이런 흥행작은 언제나 '전석 매진'이라는 단어가 당연스레 따라오는 것이고, 당연히 평일보다 주말과 공휴일에 영화 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니 미리미리 영화표를 예매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부끄럽게도 나이 스물이 되도록 영화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저로서는 그런 난관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저 시트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현장에 가서 표를 끊어도 될 것이라는 굉장히 안일한 생각 뿐이었죠.


그렇게 저는 약속 시간보다 약 1시간 일찍 약속 장소인 A영화관에 도착했지만, 예매가 가능했던 날들보다 너무 늦은 때에 현장 예매를 시도했고, 당연히 어벤져스 현장 예매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의 저도 거기서 바보 짓을 하고 있던 그 때의 저를 찾아가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저는 예상치 못한 현실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내와 영화를 같이 볼 수 없는 건 당연하고, 그것은 곧 그 날 데이트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었죠. 당황한 저는 그제서야 제 스마트폰에 주요 영화관 예매 어플을 다운로드받고 약속 시간에 맞춰 어벤져스를 볼 수 있는 상영관이 있는 영화관을 급하게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A영화관에서 그나마 가까운 B영화관에서 약속 시간과 엇비슷한 시각에 어벤져스를 상영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것도 '조금이나마 좌석이 남아있는 상태'로 말이죠.


그 순간 제게 더 이상 재고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B영화관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플까지 다운로드 받아놓고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저는 또 B영화관에 무작정 현장예매할 생각부터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동하는 도중 아내에게 제대로 된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약속장소를 바꾸게 됐으니 그쪽으로 오라는 카톡을 보냈습니다. 보통의 여자라면 여기서부터 남자의 행동에 매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게 맞겠습니다만, 누차 말씀드리듯 아내는 저와의 관계에서 '썸'의 ㅆ도 떠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순순히 알겠다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 상영 10여 분을 앞두고 B영화관에 가긴 갔는데...당연히 현장예매가 될리가 없었습니다. 현장예매를 하려고 마주한 영화관 직원이 굉장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예매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던 건 덤이었죠. 그 순간 저의 마음은 마치 지구 종말을 앞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원래 보기로 약속했던 어벤져스를 보려면 지금부터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고, 제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를 아내는 약속 시간에 맞춰 저를 찾아 B영화관에 도착해있었죠.


더 이상 원래대로 계획을 진행할 수 없던 저는 전혀 구상하지도 않았던 '플랜 B'를 진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왕 볼 수 없으니 다른 영화를 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죠. 어떤 영화를 봐야할 지 알아보고자 카운터 위의 전광판을 봤었죠. 처음에 뜬 건 '후궁: 제왕의 첩'이었습니다. 당연히 탈락이었죠. 아직 제대로 사귀지도 않은 여자와 대놓고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본다는 건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영화는 뭐가 있는지 다시 살펴보는데 제 눈에 이 영화가 보였습니다.



어벤져스보다는 조금 늦게 개봉했던 영화 '맨 인 블랙 3'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서 '그래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1. 12세 이상 관람가였다

2. 약속시간에 맞춰 상영하는데, 좌석도 여러 개 남아있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카운터에서 맨인블랙 3 예매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관 직원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영화 보러 가시면 두 분이서 나란히 앉으실 수 없는데 괜찮으세요?


정신이 온전한 상태라면 당연히 그 누구라도 예매 취소를 하는 게 당연한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 정신이 어떻게 된 상태였는지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 그냥 최대한 가까이 앉게만 해주세요!


답변을 들은 영화관 직원은 알겠다고 하고서는 최대한 가까이 앉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제 요청을 들어줬고, 그 결과 저와 아내는 서로 '앞뒤로 앉아서' 맨 인 블랙 3를 보러 상영관에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제가 앞줄, 아내가 뒷줄에 앉은 채로 말이죠. (여담이지만 지금도 제가 어디 가서 이 얘기를 하면 다들 제게 '아내한테 뺨맞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아내였어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맨 인 블랙 시리즈에서 기억을 지울 때 사용하는 뉴럴라이저를 저와 아내에게 써서라도 이 기억을 지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마 작정하고 콩트 대본을 작성해도 이렇게는 작성하지 못할 것 같은 사건들을 겪은 뒤에 영화를 본 것이었지만, 놀랍게도 저와 아내는 평화롭게 영화를 보고 나왔습니다. 되려 아내는 자기 몫까지 예매해서 영화를 보여준 것에 고맙다고 말할 정도였죠.


영화 보기 계획을 망친 제게 남은 것은 '식사'와 '바래다주기'였습니다. 영화를 봤으니 식사를 그럴싸하게 대접해야 할 차례인데, 다행히 이 계획은 극적으로 성공했었습니다. 원래 아내는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영화는 네가 보여줬으니 밥은 내가 사겠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한 채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습니다만, 어째선지 아내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영화관 근처 백화점 푸드코를 가서 밥을 먹었죠. 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아내가 밥값을 결제하고자 쓰려던 체크카드의 잔액이 모자랐던 바람에 제가 영화에 밥까지 대접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구는지 모르는 아내는 멋쩍어하며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제 입장에선 되려 제게 밥 살 기회까지 준 아내가 더욱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지막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학교 근처 역까지 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내는 개찰구를 통과해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려는 저를 말리며 '기숙사까지는 알아서 가겠다'고만 했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렇게 개찰구 앞에서 아내와 인사를 하고 보냈습니다. 이 때 아내는 개찰구를 넘어가며 '안녕'이라고 말하고 갔었는데요, 저는 그게 당연히 저한테 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그건 무생물에게도 인사를 하는 버릇이 있는 아내가 개찰구에게 건넨 인사였었죠.(아내의 이 버릇은 아직도 여전합니다.) 저만의 착각이 하나 쌓였던 셈입니다.


그렇게 저와 아내의 첫 데이트는 이렇게 끝났었습니다.


P.S. 제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아내는 저랑 무슨 영화를 봤는지를 까먹었더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랑 영화를 봤었다는 사실은 안 까먹었으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튼 같이 영화를 봤습니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