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울의 모 학원. 원장은 오직 결과만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다. 과정이 어쨌든 간에 상관없이 맡은 학생 수의 결과만으로 책임을 지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프로 강사의 기질이 있는 자에게는 좋은 판(field)이었지만, 조직에 속해서 자리보전만 하려는 소극적인 자에게는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교무실 자리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노래를 듣든, 다른 강의실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든 간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무한한 자유를 제공하되, 그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프로의 세계였다.
사실 강의가 뛰어나서 원생들이 몰리게끔 해야 하는 게 정석인데, 강의력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상위 1%의 1타 강사를 제외하고는 사실 거기서 거기라는 입장이고, 나머지는 관리력이나 마케팅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장은 마케팅과 영업에 주력을 두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평소에는 대외적인 활동을 하느라 바빠, 학원에 보이지 않아, 원생들조차도 원장님 얼굴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였다. 아마 추측건대, 주변 학교 학부모위원회 활동이나 다양한 모임을 나가는 것 같았다. 이런 정보들을 알게 된 건, 원생들의 가족관계나 학원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 이리저리 듣게 되면서였다. 원장 후배의 자식들이 다닌다든지, 학부모위원회에서 연결된 사람들이라든지 등등 원장의 인맥을 통해 들어오는 원생들이 은근히 많았기 때문이다.
원장은 학원을 수십 년 운영하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주었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자영업자가 5년 이내에 가게를 접는 확률이 80%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이 점이 아니더라도, 이 바닥에 좀 구르다 보면, 대박이 나서 명성을 알리는 학원도 좋지만, 그 자리에서 십수 년 혹은 수십 년간 버텨왔다는 자체가 그만큼 저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이 이 바닥만큼 와닿는 곳도 없긴 하다. 여하튼, 원장은 그렇게 오래 버텨오면서 월급을 주었다는 점을 매우 자부하였는데, 월급을 주었다는 사실을 자부할 뿐이지, '제때에 주었는지'는 관심사가 아닌 듯해 보였다. 여튼간에, 10일 늦게 주더라도 주는 건 주는 것이었으니까.
내 기준에서는 고용주가 월급을 '제때'에 주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다. 월급을 준다는 자체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내가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인데, 왜 원장이 생색을 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월급날이 주말이면, 미리 주는 센스는 부족했다. (주말엔 대부분 입금하지 않았다) 제날짜에 받은 기억은 별로 없고, 심지어 첫 월급날에서조차 2~3일은 밀렸던 것 같다. 한 번은 3~4일이 지나도 입금이 되지 않자, 원장에게 연락을 했더니, 후에 '너는 돈에 대해 왜 이렇게 민감한지 모르겠다'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또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은 명절날 원장 선물이었다. 원장은 고용주이고, 그동안 고생한 직원들에게 선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부분이지만, 강사들이 원장에게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선물을 준다는 점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마치 직원들이 돈을 모아 명절마다 사장에게 선물을 주는 것처럼 이상한 광경 같았다. 이 기획이 원장 똥X를 빨기 위한 데스크 부장의 머리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오랜 관행처럼 되어 왔던 것 같다.
원장의 아내, 즉 사모는 강사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라 불렸다. 첫 출근 날, 여느 교무실처럼 교무실의 터줏대감 노장 선생께서 퇴근 후 벙개를 외쳤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학원에 대해 물어보다, 사모에 대해 얘기가 나왔는데, 다들 쭈뼛쭈뼛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입은 근질거려서 안달이 났으나, 누군가 첫 발을 발사하면, 좀비들처럼 득달같이 달려들 기세였다.
"사모님... 흐음... 대단하신 분이죠..ㅎㅎ"
라며 누군가 운을 뗐지만, 그 함축적인 의미는 후에 알 수 있었는데, 도시적이고 세련된 외모 뒤에는 마치 왕이 없는 자리에서 왕궁을 지배하는 왕비와도 같은 포스로 학원을 지배하였다. 대놓고 뭐라 하는 모습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한 번 화를 내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어느 날은 여느 때처럼 자리를 조금 비웠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데스크 부장이 조용히 와서는, "사모님이 '왜 자리 비우냐'라며 뭐라 하신다."라며 대충 눈치를 봐서 자리를 지키라는 귓속말을 하였다. 원장도 아닌, 아무 직위도, 아무 권한도 없는 원장 아내가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단지 원장 가족이라서? 만약 사모가 출근을 해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상사로서 직접적인 지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모는 학원에 가끔 얼굴을 비추는 그저 놀러 다니는 돈 많은 주부였을 뿐이었다.
당시 학원에는 원장의 딸이 다니고 있었는데, 그런 엄마를 닮아 거였을까? 막내딸은 안하무인 그 자체였다. 아빠가 원장이었으니 아마도 그 학원이 자신의 놀이터라 여겼는지는 몰라도, 옆 교실에서 질러대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내가 수업하는 강의실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교무실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하는 정도야 그렇다 치지만, 자기 방처럼 생각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의 모습이 사모의 DNA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실력이 어느 정도 있는 강사들은 이런 학원에 존재할 수 없다. 원장이 조금이라도 갑질을 하거나 근거 없는 비합리적인 지시를 한다면, 여지없이 그 학원을 떠나기 때문이다. 반면 슬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머지 강사들이 저런 비합리적인 학원에 남아있는 이유는 단 하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채용이 힘들거나, 실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자신감이 없거나 하는 강사들만이 오직 월급만 바라보며 버티는 것이다. ('너는 그럼 실력 있어서 나온 거냐?'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학원에서 짤렸으니, 내가 실력이 있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또한, 나도 저 남은 강사들처럼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쓰고자 했던 것뿐이다.)
'나는 훗날 원장이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지만, 누가 알까? 앉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나도 그렇게 될까 봐, 사서 걱정을 해본다. 어휴..... 일단 수학 문제나 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