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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우 Dec 25. 2020

당신이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

지금 시작하라

기억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휘발성'이다. 잊히기 쉽고, 증발하기 십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또 버려진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원시부터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동굴  낙서부터 양피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쓰기'는 도망치려는 기억을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쓰던 일기도 목적은 같았다. 자의가 아니었다는 사실만 빼면.


어릴 적 그렇게 쓰기 싫었던 일기는 돌아보니 나만의 역사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어떤 글은 그 자체로 유산이 됐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역사서나,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 등, 성격은 다르지만 역사를 관통하는 생생한 목소리는 후대에 많은 깨달음을 줬다. 그와 별개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같은 명작 소설도 대대로 전해졌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아무나 쓸 수 없는 글만이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물론 위 사례는 당신이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이 희대의 명문을 남기려는 목적으로 글을 쓴다면 십중팔구 쓰다 지쳐 혼절하겠지. 아니면 작심삼일이거나. 그런데 왜 쓰라 하느냐고? 답은 간단하다. 쓰지 않는다면 잊힌다. 적지 않는다면 일말의 기회조차 없다. 남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축전지와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은 3천4백여 개의 메모를 남겼다. 그의 발명은 떠오르는 영감을 적어 내려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수많은 아이디어 중에는 볼품없거나 실현 불가능한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에디슨이 아무 것도 적지 않았다면, 그의 업적도 존재할 수 없었다.


에디슨이 남긴 메모. 메모장만 3천4백 개였다

무언가 발명하라는 말도, 대단한 글을 쓰라는 종용도 아니다. 뉴베리상 수상자였던 작가 닐 게이먼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라. 당신보다 더 똑똑하고 우수한 작가들은 많다." 어떻게 보면 팩트 폭력일 수 있지만 참 맞는 말이다. 읽다가 욕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하지만 어떤 글이든(심지어 일기일지라도), 글은 자신의 유산이 된다. 단순한 단상이라도, 혹은 평범한 일상의 소회라도 마지막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글은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신만의 역사서, 혹은 에세이가, 또는 소설이나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글이 중언부언하든 주술 관계가 맞지 않든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쓰고 안 쓰고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다만 좀 더 좋은 글, 읽기 편한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누가 언제 내 글을 읽을지 모르는 것 아닌가. 만약 브런치에라도 올린다면 더 그렇겠지. 그 과정에서 본인의 실력도 상승한다. 여러모로 나쁠 게 없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창조는 보람차다. 쓸 때는 골치를 썩이지만 다 쓰고 나면 그것참 개운하다. '오늘도 뭐 하나는 남겼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들뜬다.


사실 글쓰기는 어렵다.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소설가 김훈도 <칼의 노래> 첫 문장 쓰기에 수일이 걸렸단다. 시작하기가 어렵다면 이상처럼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동원해도 좋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건 쓰는 거다. 시작이 반이다.


이상은 막 써도 잘 쓰긴 했다


누군가에게 '글을 쓰라'며 충고하는 이 글도 어떻게 보면 무척 남사스러운 글이다. 이걸로 누군가가 설득될 거라는 기대는 감히 하지 않는다. 다만 이 내용을 써 내려가며 나는 나 자신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각인했다. 이로써 오늘도 한 편의 글을 썼고, 써야 하는 핑계를 찾았으며, 얕은 지식을 한 겹 더 쌓았다. 만약 글을 읽은 당신이 오랜만에 펜(키보드)을 잡기 시작한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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