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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plash Oct 20. 2018

남겨진 이로써, 곧 떠나갈 이로써

<지독한 하루> 남궁인

이 책은 아마 작가가 지독한 하루를 보낸 후에 남겨진 찌꺼기 같은 것들을 덜어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해 조금씩 모인 글들 같았다. 매일매일이 인간의 생과사를 지켜보는 사람이라서 그럴까 이 책에 쓰인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유명한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죽음에 관한 글보다 더 생생한 날것처럼 들렸다.

나는 이 책을 한 호흡에 끝낼 수 없었다. 심지어, 한 장(챕터)도 한 호흡에 끝내기 어려운 것들도 몇 있었다. 영화 속 잔인함에 코웃음 치듯 이 책에 쓰인 응급실 안에서의 세세한 묘사와 사망한 이들과 동요되는 남아있는 사람들, 또 그런 일들을 매일 견뎌내야 하는 의료진들의 삶은 한숨으로 걱정이 덜어지지 않듯 '지독한 하루'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느낄 만큼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온전히 이 책에서 전해졌다.


한 장을 끝낼 때마다 마음이 벅차 잠시 책에 서표를 끼고 덮고 잠시 멍 때리다 다시 읽고 다시 덮고 잠시 또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눈물이 나기도 했고 허탈하기도 했다. 이해하려 했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결국 모든 건 신의 뜻이라는 말밖에 답은 나오지 않았고 저자가 말한 대로 인간의 손끝에서 내릴 수 있는 결정 곧 의학은 결국 과학이고 모든 설명되지 않는 예외들도 결국에는 가장 가까운 의학의 범주 안에 속하게 될 뿐인 것이 지금 의학의 한계 즉 우리의 한계다.

우리의 상식선에서 가장 첨단에 있는 그는 '평등한 죽음이란'이라는 질문에 우리가 모두 동시에 태어나지 않듯 이 질문 자체가 합당치 못하고 죽음은 결국 불평등할 수밖에 없지만 그는 여전히 그 질문에 다시 머물게 된다고 했다.

어쩌면,

죽음의 경계를 가장 많이 관찰해온 그의 질문에서 떠오른 이기적인 생각은, 우리가 모두 늙고 죽어가는 게 당연한 이치지만 이 사실은 죽음의 불평등함에 가려져 우리는 평소에 그것을 망각하고 더 '잘' 지내는지도 모른다.


삶의 유한함 때문에 의사들은 결국 그날 환자를 살린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들의 죽음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은 매일매일이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오롯이 감당하는 그들의 감정노동은 마치 이 책을 읽으며 늘어나기만 하는 책의 읽은 부분 같았다.

그 책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강도 높은 노동 속에서도 고독과 불안함을 느끼며, 몇 마디에 말과 몇 번의 손짓에도 무너질 수 있는 마음, 현 제도에 불만이 있어도 아직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의사들도 우리처럼 한 사회의 집단에 불구하다는 것을 작가는 계속해서 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전반적인 서글픈 분위기 안에서도 역설적으로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잘 살아보자'라는 말을 하고 싶은 듯했다. 에필로그에서 그의 먼저 떠난 동료를 기억하며, 남겨진 이로써, 또 곧 떠나갈 이로써 앞으로도 이 사회에 우리가 비출 수 있는 각자만의 작은 몫을 찾아서 해나가자고.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보이는 이 책 제목에 '하루'라는 단어가 이렇게 입체적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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