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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아 Mar 25. 2020

20시간 격리시설 체험기

지난 22일 낮 12시, 핀란드 로바니에미에서  헬싱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승객은 채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헬싱키에 도착해 도쿄행 항공편에 체크인.

전재산을 이고 지고 다니느라 부치는 가방 하나의 무게가 27kg가량이다.

맨체스터를 떠날 때부터 3차례 체크인 동안에는 승객이 없어 그런지 별말 없이 그냥 받아줬는데, 이번엔 좀 깐깐한 직원을 만났다. 23kg에 맞게 짐을 줄이란다. 아니면 백유로 가량을 내든가.

땀 뻘뻘 흘리며 짐을 빼고 다시 체크인.


드디어 출발시간이다.

그런데 게이트 직원이 내 여권과 비자를 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그러더니, 내 일본 비자가 무효화되어 일본에 입국할 수 없단다. 최근 일본 정부에서 3월 20일 이전에 발급된 비자를 모두 무효화했기 때문에 일본대사관으로 돌아가 재발급을 받아야 한단다.

이게 무슨 개소린지.

코로나의 여파 때문이라는데,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가 많아지고 있는 마당에, 오히려 확진자가 적었던 때에 받은 비자는 무효화되고, 확진자가 많은 지금 비자를 다시 요청하면 내준다니. 이런 참신한 개소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게이트 직원에게 일단 비행기에 타고 일본에 내려 입국심사관과 확인해보겠다고 했더니, 일본에서 나가는 항공편이 있어야 태워줄 수 있단다. 그 자리에서 도쿄발 인천행 비행기를 구입하고 탑승했다.


약 아홉 시간 후, 도쿄에 내려 입국심사관에게 물으니 옆쪽 사무실로 데려가 기다리게 하고는 내 여권을 들고 이리저리 알아보러 다닌다. 그렇게 이십여분 기다려 들은 말은 헬싱키에서 탑승 전 핀에어 직원이 했던 말과 동일했다. 3월 20일 이전에 발급된 비자는 무효화되어 일본 입국을 허가해줄 수 없단다.

나가서 짐을 찾아 한국행 비행기에 체크인을 하라고 환승용 입국 허가 딱지를 붙여줬다.


허... 이게 뭔 일인지.

4월 1일부터 근무하기로 되어있던 회사 담당자에게 연락하니 그쪽도 황당해한다. 그런데 정부가 결정한 일이니 회사에선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근무시작일을 늦춰주는 수밖에.


나리타공항 3 터미널에서 열 시간가량을 기다린 후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노선이 여전히 운행되는 게 다행이다. 어디로도 떠나는 비행기가 없었더라면, 영화 <터미널>에서처럼 오도 가도 못하고 터미널에 격리되어 먹고 자는 국제미아가 될뻔했다. 그것도 시설이 엄청나게 후진 작은 터미널에서!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

밤 11시 30분에 도착해 4장이나 되는 각종 신고서를 들고 입국심사장으로 갔다.

심사장 직전에 자가진단 신고서를 제출하고 체온을 쟀다.

그다음 여러 명의 직원들이 도착 승객 모두를 한쪽으로 모아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자가진단’ 어플을 깔고 국내 연락처를 적도록 했다.

입국심사관 전에 또 다른 직원들이 있었다. 이 직원에게 다른 신고서들을 보여줬더니, 그 자리에서 내가 적은 국내 연락처에 전화를 했다. 나를 데리러 오던 언니가 전화를 받았다.

내가 지난 14일간 방문한 국가를 얘기했더니, 유럽에 들른 사람들은 모두 바로 격리시설로 보내져 검사를 해야 한단다. 입국장에 나를 격리시설로 가는 버스까지 안내해줄 직원이 있을 거란다.

바로 언니에게 전화해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격리시설로 향하는 길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무서웠다.

가로등도 없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지나는 동안 허물어져 가는 작은 식당 간판이 드문드문 보인다. 저 멀리 인천대교가 보이는 걸 보니 영종도에서 멀지 않은 곳인 것 같은데, 격리 시설이 왜 이런 곳에 있나, 엄청나게 허름하고 지저분한 시설인 건 아닌가, 아니면 이대로 납치되어 새우잡이배에 팔려가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몰라 보이는 간판을 다 외워두기도 했다. 그중 가장 쓸만한 게 ‘무의대교’라는 사인이었다. 위치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무의대교라는 다리를 건넜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게 불안감을 안고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휘황찬란 삐까번쩍한 건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는 SK 무의연수원이었다. 공항에서 가까워 정부에서 격리시설로 빌려 쓰고 있는 모양이다.


연수원에 도착하니 이 야심한 밤에도 근무를 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보인다. 그중 두 명의 직원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해 안내한 뒤 방을 지정해줬다. 오늘은 늦었으니 바이러스 검사는 내일 한단다.



방에 들어오는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스위트룸까진 아니지만, 여느 4-5성급 호텔의 일반 객실보다 훌륭하다.

커피스탠드도 있고, 욕실용품도 있고, 칫솔 치약 심지어 빗까지 있다.

가족들에게 연락한 후 긴 샤워를 하고 누웠다. 지난 30시간을 깨어 있었더니 아주 죽을 것 같다.


아침 7시 22분. 방송으로 나오는 어느 여자분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침식사 배달을 시작하니, 배달이 끝날 때까지 문을 열지 말고 약 20분 후에 문 앞에 둔 도시락을 가지고 들어가란다.


기다리는 동안 커튼을 열었다.

어머나.

대박이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끝내주는 전망을 가진 격리시설은 없을 거다.



바깥쪽 문고리에 아침식사 봉지가 걸려있었다. 내용물은 샌드위치와 샐러드, 생수 한 병. 어떤 밥이 나올지 궁금했는데.

아마 여기가 프랑스나 영국이었더라면 크루아상 하나에 우유가 들어있었을게다. 물론 공짜도 아니겠지만.


아침을 먹고 다시 누웠다. 이 엄청난 여독을 풀려면 30시간 정도는 내리 자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멀었다.

한 시간쯤 잤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깼다. 방 소독을 하러 왔단다.

문을 여니 영화 <괴물>과 TV 뉴스에서 최근 자주 봤던 방역복을 뒤집어쓴 직원 둘이 커다란 기계를 들고 있다. 소독하는 동안 나가 있으라고 하더니, 약 3초간 소독제를 방 안에 난사하고는 십 초 후에 들어가란다. 이렇게 소독을 하면 병원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러고 나니, 마치 내가 <괴물>의 송강호가 된 기분이다. 마치 내가, 인류를 싹 다 멸망시킬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진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는 존재 같다. 뭐, 실제로 내가 보균자라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겠다. 이 바이러스를 뿌리 뽑을 수 있는 뭔가가 아직 없으니 말이다.


들어가서 다시 누운 지 얼마 안 돼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드디어 검사다.

검사하는 사람이 베란다에 나를 앉히고는, 입 안에 면봉을 넣어 ‘아~’ 소리를 내라고 했다. 면봉이 목젖을 건드려 아주 괴로웠다.

그러고는 코 속에도 면봉을 넣는단다. 간지러울 테니 놀라지 말고 움직이지 말란다. 그런데 간지러운 게 아니라 그냥 아프다! 몇 초간의 괴로운 시간 끝에 검사가 끝났다.

전 세계를 뒤집어 놓은 파워풀한 바이러스 검사치고는 꽤 간단하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또다시 방송이 나왔다.

점심 메뉴는 초밥이 8조각 들어있는 도시락과 과일, 샌드위치, 생수 한 병이다.

생선 맛을 몰라 초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이 초밥은 내가 지난 72시간 동안 먹은 음식 중 가장 훌륭했다.

과일까지 먹고 나니 배가 불러 샌드위치는 남겨두었다. 내가 안 먹으면 다 쓰레기가 될 텐데, 아깝지만 어쩌겠는가. 미리 메뉴를 알았더라면 샌드위치는 주지 말라고 얘기했을텐데.


먹고 다시 누웠다.

계속 끊어서 잤더니 피곤이 가시지 않는다.

자다 깨니 저녁 6시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시끄러운 방송도 못 듣고 잔 모양이다.

저녁이 배달되었나 싶어 문을 열어보니 아주 묵직한 비닐이 걸려있다.

저녁 메뉴는 다른 두끼에 비해 훨씬 훌륭하다.



양도 어마어마하다.

밥, 불고기, 김치, 무말랭이, 오이무침, 멸치볶음, 닭강정, 동그랑땡, 떡갈비, 과일, 샐러드, 바나나, 컵라면, 초코바, 젤리, 감자칩, 캔커피, 생수.

아니 이걸 어찌 다 먹으라고.

이따 저녁에 TV 보며 과자 먹고 밤에 야식으로 라면을 먹으라는 얘긴가.

우선 내가 가장 원하던 밥과 반찬을 뚝딱 해치웠다. 마무리로 샐러드까지.


밥을 먹고 베란다로 나가 바다를 보고 있는데 방 안 전화가 울렸다.

검사 결과가 음성이니 집에 가란다.

짐 싸서 7시 20분까지 로비로 나오라니, 30분 안에 짐 싸고 옷 입고 내가 만든 쓰레기를 안내에 따라 넣고 박스를 밀봉하고 소독한 후 문 앞에 내놓는 것까지 모두 해야 한다.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했다.

여러모로 너무 좋아 하룻밤 더 있고 싶었는데 아쉽다.


버스를 타고 공항에 내렸다.

나를 데리러 오신 엄마와 함께 집으로.

14일간의 자가격리를 위해, 엄마가 나 혼자 쓸 욕실을 지정해주고, 밥도 사식처럼 방에 넣어주신단다.

앞으로 이주 동안, 청소, 요리, 빨래 모두 엄마가 다 하고 나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방에서 밥 받아먹으며 먹고 자기만 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어이구야 이게 뭔 짓인지.

이 바이러스가 인류의 종말을 가져온거라면, 지금 내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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