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개념의 해체, 전복, 그리고 새로운 지평

현대철학이 바라보는 본질이란

by wis

칸트가 그어 놓은 '알 수 없는 물자체'라는 경계선은 서양 철학의 오랜 '본질' 탐구에 거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물의 궁극적인 '본질' 을 결코 알 수 없다면, 그동안 철학자들이 추구해 온 '객관적이고 고정불변하는 본질' 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연 유효한 것일까요? 어쩌면 '본질'에 대한 집착 자체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대 철학은 이처럼 근대 철학, 특히 칸트가 남긴 유산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거나 때로는 과감히 전복하면서, '본질'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훨씬 더 다양하고 급진적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본질'은 더 이상 찾아야 할 숨겨진 보물이 아니라, 해체되거나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문제적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 관심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무엇임(whatness)'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경험', 개인의 절박한 '실존',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생성(becoming)'의 과정,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관계'와 '구조'로 옮겨갑니다. 마치 고요한 호수 표면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현대 철학은 '본질'이라는 오래된 개념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킵니다.


독일 관념론의 마지막 불꽃, 헤겔: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절대정신'의 본질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은 그의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물자체'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 정점에 있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은 역사를 '절대정신(Absolute Spirit)' 이 변증법적 운동(정립-반정립-종합)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본질'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발전하며 드러나는 역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세계의 본질은 결국 이성의 자기 전개 과정 그 자체이며, 철학은 이 절대정신의 자기 인식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학문이었죠.


현상학: "사태 자체로!" – 의식에 나타나는 순수한 본질을 찾아서


20세기 초,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은 철학이 확실한 학문적 토대를 잃고 혼란에 빠졌다고 진단하며, 새로운 출발을 모색합니다. 그의 구호는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였습니다. 이는 모든 기존의 이론, 선입견, 과학적 가정을 일단 괄호 안에 묶어 판단을 중지하고(그는 이를 '에포케(epoché)' 또는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오직 우리의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순수한 '현상(phenomenon)' 그 자체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후설은 이렇게 정화된 의식 속에서, 개별적인 경험들을 통해 변화하지 않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구조, 즉 '본질(Wesen 또는 eidos)'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수많은 빨간색 사물들을 경험하면서 그 개별적인 차이들을 넘어 '빨간색임(Redness)'이라는 순수한 본질을 직접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본질 직관(Wesensschau)'은 의식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인 '지향성(intentionality, 의식이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성질)' 개념과 함께 현상학의 중요한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후설은 이 방법을 통해 모든 학문의 엄밀한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실존주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내가 바로 나의 본질을 만드는 창조자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은 산산조각 나고, 개인의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깊은 회의가 유럽 사회를 휩쓸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실존주의(Existentialism)가 강력한 호소력을 얻게 됩니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들인 덴마크의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 와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는 이미 19세기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 체계보다는 개인의 주체적인 결단과 실존적 체험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본질'과 기독교적 절대 가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고정된 본질 대신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며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 를 세계의 근원적인 역동성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은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는 실존주의의 핵심 명제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를 통해 인간 존재의 급진적인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책상이나 칼 같은 사물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용도와 설계(본질)가 결정되어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성이나 목적 없이 이 세상에 그저 ‘내던져진 존재’이며,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의미와 가치, 즉 자신의 ‘본질’을 창조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완전한 자유이며, 그렇기에 자신의 모든 선택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는 스승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독자적인 존재론을 펼쳤습니다. 그는 서양 철학사 전체가 '존재자(das Seiende, beings, 세상에 있는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물음에만 몰두한 나머지, 정작 '존재 자체(das Sein, Being, 존재함 그 자체)'를 망각해왔다고 비판했습니다(이를 '존재론적 차이'라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자라고 보고, 이러한 인간을 '현존재(Dasein, 거기에-있음)'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현존재의 구체적인 실존 방식(예를 들어,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불안, 세상 속에 마음 쓰며 살아가는 염려 등)을 분석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밝히려 했습니다. 그의 후기 사상에서는 존재 자체가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또 은폐하는 '존재의 역사(Seinsgeschichte)'에 주목하며, 기술 시대의 위험성과 시적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본질'은 관계 속에서, 혹은 해체되어야 할 허상?


20세기 중반 이후, 언어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인접 학문의 영향을 받아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가 등장하면서 '본질'이라는 개념은 또 다른 거대한 도전에 직면합니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구조주의는 개별적인 요소나 주체의 내재적 '본질'보다는, 사물들을 규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structure)'나 '체계(system)', '관계망' 에 주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언어에서 개별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 자체에 고유하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차이) 속에서, 즉 전체 언어라는 구조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류학(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정신분석학(자크 라캉)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었습니다.


구조주의가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구조를 찾으려 했다면, 1960년대 이후 등장한 포스트구조주의는 이러한 구조 자체의 고정성이나 중심성, 그리고 그 이면에 깔린 권력 관계를 문제 삼으며 더욱 급진적인 사유를 펼쳤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는 우리가 '자연스럽다'거나 '본질적'이라고 믿는 많은 개념들, 예를 들어 '광기', '성(sexuality)', '범죄', 나아가 '주체'라는 개념까지도, 사실은 특정 시대의 지식/권력 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변화해온 담론의 산물임을 날카롭게 파헤쳤습니다. (그는 이러한 연구 방법을 '고고학' 또는 '계보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본질'이란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권력이 만들어낸 효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는 서양 형이상학 전체가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로고스중심주의(말/이성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본질', '중심', '기원', '진리'와 같이 고정된 의미를 보장한다고 여겨졌던 모든 개념들을 철저하게 '해체(deconstruction)' 하려 시도했습니다. 그에게 의미란 결코 하나의 단어나 텍스트 안에 온전히 담길 수 없으며, 다른 기호들과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지연되고 미끄러지는 '차연(différance)' 의 놀이 속에서만 잠정적으로 발생할 뿐입니다. '본질'이란 결국 붙잡을 수 없는 유령과 같은 것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이었죠.


프랑스의 또 다른 중요한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는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전통적인 '동일성의 철학'과 대상을 똑같이 복제하려는 '재현의 철학'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고정된 '본질'이나 '정체성' 대신,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며 다양성을 펼쳐내는 '차이 자체(difference in itself)', '반복(repetition)', '생성(becoming)', '리좀(rhizome, 뿌리줄기처럼 중심 없이 연결되는 네트워크)',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 고정된 기능에서 벗어난 잠재적 신체)' 등의 혁신적인 개념들을 통해 세계를 사유했습니다. 그에게 본질이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힘들(강도)이 마주치는 사건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고 변형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의 흐름들: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의 시선


한편, 20세기 초부터 영미권을 중심으로 발전한 분석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들을 명료하게 만들거나 아예 해소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본질'과 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용어들이 종종 언어적 혼란이나 개념의 오용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비판적으로 검토했죠. 예를 들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이라는 단어가 모든 게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단 하나의 '본질'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겹치고 교차하는 다양한 특징들의 네트워크, 즉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을 통해 그 의미가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고정된 본질 개념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을 제시한 것이죠. 과학철학 역시 과학적 방법론과 이론의 본질, 그리고 과학적 지식이 과연 세계의 '진짜 모습(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지 그 한계 등을 탐구하며 '본질'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현대 철학에 이르러 '본질'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하나의 단일하거나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여전히 의식의 심층에서, 혹은 인간 실존의 근원적 조건 속에서 어떤 형태의 '본질'을 찾으려 했지만, 많은 다른 철학자들은 '본질'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하거나 해체하고, 그 자리에 과정, 관계, 생성, 차이, 담론, 권력과 같은 새로운 키워드들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본질'을 둘러싼 현대 철학의 풍경은 매우 다채롭고, 때로는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펼쳐집니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인간 존재 자체가 그만큼 단선적이지 않고 다층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이 길고 긴 '본질' 탐구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이 모든 논의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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