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남기려는 인간의 본능
나의 끄적거림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친구와 쪽지를 주고받는 걸 좋아했고,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싶어서 일기를 빠짐없이 썼다.
(물론 방학엔 밀려 쓰기도 했다.)
학급 임원이 되고 싶었지만, 소심했던 나는 후보조차 되어보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서기’였다.
토요일 아침, 1교시 학급 회의 시간이 되면 교탁 앞 책상에 앉아 회의록을 펼치고 회의 내용을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필기만큼은 누구보다 꼼꼼하게 했다.
졸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고, 시험 기간이 되면 친구들이 내 노트를 빌려갔다.
(그때 500원이라도 받을 걸, 괜히 아쉽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취업 준비 때문에 전공책을 요약해서 서브노트를 만들고,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감정 일기도 썼다.
그 시절, 기록은 내 삶의 일부였다.
이상하게도 취업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기록을 멈추게 됐다.
더는 이룰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기록보다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었고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그렇게 기록은 점점 멀어져갔다.
시간이 흘러 마흔을 넘기고 나니 예전엔 생생했던 기억들이 하나둘 흐려졌다.
머릿속 서랍을 아무리 뒤져도 그때 그 감정이 잘 꺼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15년 전 근무했던 직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박스 하나를 열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상자 속에는 그 시절 내가 남긴 근무일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수첩 안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어둔 짧은 문장들 속에서 그때의 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20대의 내가 보였다.
그 순간, 알게 됐다.
기록은 나를 위한 선물이란 걸.
그냥 흘려보내면 잊히지만,
남겨두면 언제든 다시 꺼내볼 수 있다는 걸.
아무 일도 없던 평범한 날조차
언젠가는 그리워질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다시 쓰기로 했다.
감동도, 재미도, 특별한 의미가 없어도 괜찮다.
그냥 살아 있는 보통날을 남기고 싶다.
서툴지만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