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졔리 Sep 20. 2023

묵사발! 이 녀석!

<불효녀 일기>

복남 씨를 밖으로 나오게 할 구실을 오빠가 예약했다. 장소를 고르고 예약하고 복남 씨를 꼬득이는 일은 오빠의 특기다.


친정식구가 모이면 10명 중 4명이 어린이라 아이를 챙기느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로 집에서 배달을 시켜 먹거나 해먹는 쪽으로, 아이들도 먹고 방에 가서 놀 수 있고 복남 씨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집에서 먹는다. 그러나 이번 식사는 오빠의 이직 감사 식사 대접 겸 복남 씨 외출이 목적이었다.


-


엄빠가 도착하셨다. 원래 마련한 자리로 복남 씨가 걷기 어려우니 문가인 내 쪽에 급히 앉혔고 아빠는 며느리와 사위 사이에 앉았다. 대체로 우리는 아이들 보느라 정신 없고 아빠가 복남 씨 식사를 챙겨주는데 오늘은 좌우에서 딸과 아들이 복남 씨를 커버하고 아빠는 자유롭게 식사할 수 있는 포메이션이 되었다. 오빠가 메뉴판을 건네주며 고기는 시킬 거고 다른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었다. 메뉴판과 질문을 복남 씨에게 들이밀었다.


“동치미국수, 비빔국수, 묵사발이 있대.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이거.”


복남 씨가 묵사발을 골랐다. 의외였다. 평소 비빔냉면을 선호하거니와 뭐 먹고 싶냐고 물어도 고개를 가로젓기 때문이다. 뭐 먹고 싶은지 욕구가 살아난 것, 그걸 표현해주는 것이 몇 개월만인가? 묻는 말에 대답은 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이처럼 뚜렷한 의사 표시는 없었기에 반가웠다.

묵사발을 떠먹는 복남 씨 옆에서 나도 한 사발 달게 먹었다.




다음 날, 약속한 운동시간이 되었다.

기운 내야지, 웃는 낯으로 대해야지, 종알종알 실없는 소리 많이 해야지, 즐겁게 운동하게 해줘야지, 무리하게 시키지 말아야지, 주문을 외며 복남 씨를 모셔왔다.


식탁을 도는데, 식탁과 복남 씨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부딪히며 나던 ‘탁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복남 씨가 안 짚고 한 바퀴를 걸은 것이다! 구부정하지만 그래도 많이 펴진 허리 각도로, 왼손을 꼭 쥐고 앞뒤로 살살 흔들며 걷다니!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내 손목을 꼭 쥐고, 리듬을 잃은 보폭이 불규칙하게 비실댔지만, 허벅지와 무릎이 가끔 좌우로 바들거렸지만, 코너를 돌 때도 중심이 안 잡혀 바깥쪽으로 기우뚱했다가 잰걸음으로 다시 곧추 세웠지만... 그것은 분명한 의지였다. 스스로 힘껏 걸어보겠다는.


큰 소리로 환호했다.


“와!!! 복남 씨! 손 안 짚고 걸은 거야? 잘한다! 너무 멋져!”

“와! 복남 씨! 허리도 많이 펴졌어요!”


옆에 있던 첫째도 따라 환호했다.


그로부터 천천히, 복남 씨는 식탁을 짚지 않고 4바퀴를 돌았다.

나머지 6바퀴는 힘들어 보였고 안전을 위해 식탁을 짚으며 걸었다. 쇼파에 앉아서 하는 하체 운동은 줄여서 몇 가지만 시키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식탁 8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샤워까지도 거침없이 해냈다.


틈이 보인다, 긍정적인 틈이.


묵사발을 고르는 것, 손 안 짚고 걸으려고 하는 것.

별 것 아니지만 복남 씨에게는 큰 변화다.

할 수 있다는, 해보고 싶다는, 다시 살려는 마음.      

고깃집에서 묵사발을 팔 줄이야!

묵사발이 신호일 줄이야!

내 평생에 묵사발에게 고마움을 느낄 줄이야!      


작은 거지만 복남 씨의 입맛을 당겨줘서 고맙고 그 표현을 바로 옆에 앉아 알아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오래 다운되지 않게 복남 씨가 의지를 보여줬으니 나도 다음 걸음을 향해야지.

아자아자!

작가의 이전글 소유의 인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