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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리 Nov 16. 2023

각자의 사정2

<불효녀 일기>

우리 딸들은 말이 많다.

앞다퉈 하는 말에, 귀에서 영혼이 쏟아져 나올 지경이다. 남편과 나는 수다 떨려고 결혼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말 양에는 유전이나 환경, 들어주는 부모가 있어서 그런다고,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     


들어주는 부모와 말하는 자녀, 이것은 어쩌면 내가 꿈꾸던 부모-자식의 모습이다.


나는 살가운 딸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4씬을 제외하고 나의 기억은 찢겨져 있다.     

 1씬: 하교길, 억지로 끌려가는 듯이 땅만 쳐다보며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

 2씬: 목을 조르는 엄마의 얼굴 뒤로 보이는 안방 천장

 3씬: 엄마에게 안겨 울며 같이 잠든 안방 바닥

 4씬: 엄마를 보러 간 병원의 하얀 계단


엄마에게 받은 최초의 거절.


그때부터였다. 나는 과묵한 아이가 되었다. 집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가족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누가 사랑해줄지,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한 싹도 없는데 그렇다면 나는 왜 존재해야 하는지. 새로이 생성되는 인생의 질문들을 홀로 시리게 삭혔다.


밖에서 웃다가도 집에 오면 죽음을 그렸다. 작은 간과 얄팍한 계획. 중학생짜리 가슴에 말 안 하면 누구도 모를 세 장면의 미수가 남았다.

고등학교 때는 어느 것이 난지 헤맸다. 비뚤게 보는 이들에게 삐뚤게 대하는 거라고, 나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나도 친절하다고, 아니 친절하게 굴 테니까 제발 나를 좋아해달라고, 웃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 해맑아진 어느 날, 인생을 가르는 말을 들었다.


“너 되게 사랑받지 못한 애 같아.”


악의 없이 한 말이었지만 지진이 일었다. 내가? 나 사랑 못 받고 컸나? 무엇을 보고 그런 거지?

잊었던, 가려놨던 상처를 열어보게 되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 수업을 들었다. ‘애착’ 대상의 공란이 근원적 문제인 것 같다며, 엄마에게 울분을 쏟았다. 엄마는 미안하다며 손을 잡아줬지만, 돌아가기엔, 돌이키기엔, 달래기엔 우리의 틈은 깊고도 깊었다.

24살, 어느 기도회의 도착기도에서 하나님이 용서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니가 용서하지 못한 두 사람을 용서하라고. 왜 내가 용서해야 하냐고, 사과 없는 용서가 무슨 말이냐고, 울다가 따지다가 못하겠는 나와 해야만 하는 나 사이를 씨름하다가 항복하듯 용서를 뱉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엄마의 말문이 닫혔다.


세 번째라고 한다. 첫 번째는 초1, 어려서 엄마의 어디가 아팠는지 몰랐고, 두 번째는 10대 후반, 엄마에게 무관심했고, 세 번째인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눈높이를 맞춰 엄마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엄마의 인생이 엄마가 아닌 여자로, 여자가 아닌 복남 씨로 읽혔다.


남편에게 버려지는 모멸 속에서도 아이들과 삶을 놓지 않았고, 메마르고 쌀쌀 맞은 딸을 오래도 참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1원도 아끼는 사람이 드라이기가 망가져 물을 뚝뚝 흘리며 출근하는 딸을 보고는 바로 가서 새 드라이기를 사온 복남 씨.


가족들이 제 인생 사느라 식탁에서 홀로 앉아 노을을 맞으면서 외로움과 잃어버린 이름을 얼마나 되뇌었을까.


엇갈린 사랑의 언어를 꿰어맞추려고 애쓰지 않았던 건, 오히려 나였다. 복남 씨의 모든 궤적이 사랑이었음을, 나는 사랑받는 존재였음을, 복남 씨가 아프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한테 왜 그랬어?”

복남 씨에게만 물을 수 있는 질문을 늘 품고 살았다. 복남 씨가 괜찮으면, 언젠간 물어보리라...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그 질문을 놓아주어야겠다.     


그리고 복남 씨에게 말해야지.


살아줘서 고맙다고,

잘 지내 보자고,

마주 앉아 재잘거릴 마음의 준비가 이제는 됐다고,

복남 씨의 이야기도 들려달라고,

이제는 앞으로의 계절을 이야기하자고.     


오늘도 복남 씨 손을 잡고

어색하게 소재를 고르며

식탁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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