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졔리 Aug 06. 2023

(불)효녀의 시작-2

<불효녀 일기>

복남 씨의 첫 번째 의사는 매번 이번 약은 어땠냐고 질문했다. 손을 떨었다, 잠만 잤다, 무기력증이 왔다, 식사를 잘 못한다 등 우리가 복남 씨 대신 떠들면 복남 씨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모니터만 보며 6개월 내리 맞는 약만 찾았다. 다른 의사를 찾아 표류했다. 두 번째 선생님은 복남 씨와 눈을 맞췄고 적어도 10분은 끈기 있게 질문하고 들었다. 병원을 옮기고 나서야 복남 씨는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우리도 일상을 찾는 듯했다.

오빠와 내가 연이어 결혼을 했다.

나는 남편이 살고 있던 영등포 자취방을 신혼집으로 삼았다. 출퇴근시간은 짧아졌고, 그제야 어른이 된, 부모와 이모들을 떠나 독립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 회복될수록 복남 씨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빈둥지증후군인지 우울인지가 복남 씨를 덮쳤다. 그래서 다음 해 봄, 나는 복남 씨 곁으로 이사 왔다.


복남 씨는 만삭인 딸래미를 챙겨주며 생기를 찾았다. 딸래미가 먹고 싶은 것을 사주고 가고 싶다는 데에 데려다주며 웃었다. 첫째 출산 때, 아이가 아닌 나를 먼저 만나러 와서는 지쳐 있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복남 씨도 나를 만나기 위해 이런 고통을 겪었겠구나, 새삼 눈물이 북받쳤다. 첫째가 돌이 될 때까지 복남 씨는 자신보다 나를 돌보아주었다.

우울과 조울의 날들이 복남 씨를 스쳐가며 나는 아이가 둘이 되었다.


마그마처럼 끓어오를 때가 있었다. 둘째가 세 살즈음, 아빠가 지방에 가 있는 몇 달 동안 복남 씨를 집에서 모셨다. 아이 둘에, 재택으로 일하며, 가슴과 머리가 하루 종일 부글거렸다. 남편에게는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로도 모자랐기에, '나 더럽게 힘들다'며 추적거리며 울 수가 없었다. 화살은 오빠와 아빠한테 향했지만 각자 짊어진 것들이 있으니 삼키고 삼켰다. 들끓는 분노, 복남 씨에 대한 나의 마음,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모닝페이지에 풀어헤쳐놓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부글거림을 잠재울 수 있었다.


아이들이 제법 자라니 문득, ‘아이들이 할머니를 어떻게 기억할까?’에 생각이 닿았다. 걷지 못하던, TV만 보던, 놀아주지 않던 할머니로만 기억에 남으면 어떡하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졌다. 복남 씨가 이렇게 기억되는 것은 너무 억울했다. 식물을 잘 키우는, 활기 넘치는, 사람 챙기기 좋아하는, 오빠와 나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산 복남 씨를 나만의 기억으로 남겨둘 수는 없었다. 복남 씨의 하루, 일주일, 한 달, 1년이 방 한 칸에 머물도록 더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래서 마음 먹었다. (불)효녀가 되기로.


복남 씨는 오늘도 누워 있고 싶고, 씻고 싶지 않고, 먹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효라고들 하지만, 나의 ‘효’는 그렇지 않다.

업지 않고 걷게 할 것이다. 얄팍한 근육을 사용해 계단을 내려가서 햇살을 마주하게 할 것이다. 꽃과 햇살을 좋아하던 복남 씨로 돌려놓을 것이다.

싫다고 하면 따끔하게 말해줄 거다.


이렇게 기억에 남지 말자고,

집에만 있다가 노환으로 죽지 말자고,

다른 병명으로, 아파서 죽자고.

계절별로 꽃이랑 브이 하고 사진도 몇 장 더 찍고,

아이들과 눈맞춤하고 이야기도 하고,

이모들이랑 내 차 타고 저어기 어디 꼴뚜기 축제 같은 거라도 다녀오고

그러고, 죽으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어미 무덤에 가서 후회하기 전에,


울어제끼는 나의 (불)효다.

작가의 이전글 (불)효녀의 시작-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