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 초반의 일이었다.
직장일로 서둘러 지하철을 내리는데 한 남자가 나를 붙잡았다. 말인즉, 자기는 화가이고 지하철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목이 너무 아름다워서 모델을 좀 서 달라는 것이었다. 바빠서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지만 그날 내내 기분이 좋았다. 퇴근 후 남편에게 “나 목이 예쁜 여자야 모델씩이나 서 달라고 하는 그런 여자란 말이야 알고는 있어” 하며 들떠서 자랑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그러는 놈들 다 미친놈들이야 당신이 순진해 보이니까 찔러보는 것이니까 헤벌레 해서 좋아하지 말라고 찬물을 씌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은 째질 듯이 좋았고 그 근방을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주위를 한 번 더 살펴보기도 했다.
몇 년 전 50을 살짝 넘긴 아줌마였다. 누구의 말마따나 이제 화장품으로도 가릴 수 없는 주름살과 흰머리가 먼저 보이는 그런 나이였다. 그런데도 여자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름답다는 말과 더불어. 또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 아름다운 여자야~” 하면서. 그런데 40대에 그 말을 들었을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그냥 웃고 넘어간 게 아니라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직도 나에게 색기가 남아있나 살짝 의아해했지만 기분이 좋은 것만은 확실했다. 아직도 누군가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의 아름답다는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50대 후반. 이젠 알 건 다 아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꽃이기를 포기한 이 나이에도 마른 꽃으로라도 남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었나 보다.
오랜만에 아이의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여자들의 수다는 자연 젊음에 대한 갈망이었고 누구 엄마는 아직도 참 곱다는 그러그러한 얘기들을 나누고 있을 때 한 엄마가 젊을 때 자기는 모델을 서 달라는 제의까지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 눈과 귀가 크게 반응했다. 스토리 전개과정은 나와 똑같았다. 어느 지하철역에서 화가라는 한 남자가 눈이 예쁘게 생겼으니 자기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더라는 것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시쳇말로 띵~ 했다. 그 엄마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편에게 이 우스운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허영기와 화냥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어느 누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외모에 대해 칭찬을 들은 건 내 나이가 불혹을 넘은 중년 이후이고 종종 어릴 때 보았다는 분들은 참 예뻤었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한낱 인사치레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외모를 인식한 시기부터 나는 뚱뚱했었고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예쁜 것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말이다. 「박씨전」에서 박씨 부인이 어느 때가 되어서야 추한 몰골을 벗어나 예뻐졌다고 하듯이 나 또한 결혼을 하고 나서야 외모에 대한 호의적인 말을 들어 보았기에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끄달려 왔을 것이리라. 허영기 때문이든 화냥기 때문이든,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는데 쥐도 아닌 사람의 인생에서 예쁘다는 소리 듣고 허파에 바람이 좀 들었기로서니 그리 탓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매번 다방에 찾아와 조용히 음악을 듣고 가는 한 학생을 마담은 짝사랑하게 된다. 그 학생 또한 자신을 사랑하기에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이라 확신을 했지만, 사실 그 학생은 교수의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루지 못할 사랑을 음악으로 위로받고자 다방을 찾았다는 주요섭의 소설 「아네모네의 마담」에서처럼 아네모네 마담의 텅 빈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오늘도 나는 아름다운 여자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