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듣고 싶지 않은 뉴스들이 참 많이도 들린다. 자식이 부모에게 나쁜 짓을 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던 일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요즈음은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끔찍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건 자연의 순리 이건만 이제 그 법칙마저 무너지고 있으니 학교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따돌림은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국민학교로 불리던 아주 옛날이었건만 그때도 왕따 은따라는 따돌림이 있었다. 형제가 여럿이다 보니 입하나 던 다는 심정으로 외가댁으로 보내진 나는 땅거미가 질 때쯤이면 병든 병아리처럼 풀 죽은 모습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 모습이 불쌍했던지 식구들은 더 오냐오냐 했고 그러다 보니 동네 아이들과의 놀이에서도 잘난 척을 한 것 같다.
외할아버지가 동네 유지였기에 학교에서도 은근히 누구네 손녀딸로 선생님들께 귀여움을 받았으니 친구들의 눈에는 그것이 아니꼬왔을 것이었다. 기숙이라는 아이가 특히 앞장을 서서 친구들을 주동했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삼십 여분 동안이 따돌림을 당하는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내 옆에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 아이는 주로 먹을 것을 갖고 왔다.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는 언니들이 명절 때 사 갖고 온 과일 통조림이랑 양과자와 껌 사탕 등이 무기였다. 그 귀한 것을 한 입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친구들은 그 아이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고 그러한 날들이 계속되면서 다른 친구들 또한 그것이 놀이의 일종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어떤 것에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는데 “니는 엄마 아버지도 없잖아”하는 말에는 그만 기가 팍 죽어서 아무런 대거리도 못하고 눈물만을 쏟아낼 뿐이었다. 기실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몇 달 전만 해도 엄연히 함께 살기도 했건만 엄마 아버지가 없다는 그 말에 그만 힘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함께 있지 않다는 그것만으로도 어린 내게는 어떠한 의지처도 다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엄마 아버지보다 더 보살펴 주는 이모와 삼촌들이 있었건만.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외할아버지가 노발대발해서 학교를 찾아오셨고 교장실에 불려 간 그 아이의 눈이 빨갛게 되어서 돌아오고 나서도 은근한 따돌림은 이어졌던 것 같다.
십여 년이 지나 외갓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기숙이를 만났다. 짙은 쌍꺼풀 진 눈과 꼬불거리는 곱슬머리로 세련된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반가워서 다가간 내게 그 아이는 어색한 웃음으로 거북해했다.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는 말도 없었다. 어릴 때의 일들이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날 찾아간 나에게 기숙이는 미안했다고, 그때는 너처럼 예쁘고 똑똑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힘겹게 말을 했다. 당했던 나는 기억도 가물 하건만 가해자인 그 아이는 그동안 마음이 편치 못했던가 보았다.
그 옛날의 따돌림은 지금 학생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로 순박했다. 어른들의 훈계로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날 줄 안다는 것은 그나마 애교스럽기 조차 하다. 하지만 그때도 은근히 따돌린다는 은따도 있었고, 완전히 무시하는 왕따도 있었다. 사람 살아가는 세상이란 다 비슷하게 돌아가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선한 행동이 아닐 때는 반드시 과보가 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빨리 오느냐 조금 늦어지느냐의 문제이지 좋지 못한 행동은 그 결과 또한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건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보니 자명한 일이더라. 옛말에도 때린 자는 서서 자고 맞은 자는 누워서 잔다고 하지 않았나?
연일 보도되는 그 많고 많은 가해 아이들 또한 기숙이 처럼 자신의 가슴 한편을 무겁게 짓누르는 바위 하나씩을 안고 살아갈 터인데, 그 누가 돌덩이를 억지로 지우는 것이 아니건만 왜 스스로 그런 형벌을 자처하는지 가슴이 아플 뿐이다. 마음속에 따뜻한 사랑의 느낌이 부족해서 자꾸만 밖에서 끌어들이고 싶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서로를 부러워하는 관계가 돌고 돌아 결국은 자신에게로 돌아오더라는 옛 동화처럼 내 안의 보물을 볼 줄 안다면 좀 더 행복한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