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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ya Aug 07. 2017

휴대폰 없이 보낸 한 나절

한시 반에 집을 나섰다. 

세시에 연신내역에서 남편과 만날 약속이 있어서였다. 바람 한 점 없이 내리쬐는 햇살은 모자를 뚫고 내 머릿속으로 내리 꽂히고 있었다. 5분 남짓 걷는 거리인데도 등줄기로 얼굴로 땀이 흘러내렸다. 젊었을 때 얼굴에는 땀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었다. 몸에서도 땀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갱년기를 기점으로 온몸뿐만 아니라 얼굴에선 땀이 비 오듯 했다. 모처럼의 화장이 다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지하철역까지는 두 정거장 거리라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아뿔싸! 전화기가 없다. 그건 곧 버스카드가 없다는 것이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보조 배터리까지 들어 있었지만 정작 전화기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 충전한다고 꽂아둔 생각이 났다.

이 햇살과 더위를 뚫고 다시 5분을 걸어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에 있을 아들에게 가져다 달라는 전화를 하려고 하다 헛웃음을 흘렸다. 전화기를 가져다 달라는 전화를 한다는 걸 깨닫고. 주위엔 공중전화도 없었다.

다시 가방을 뒤졌다. 혹시나 하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수첩 사이에서 오천 원짜리 한 장이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갑을 들고 다니지 않는 내 버릇을 알기에 비상금을 숨겨놓은 덕이다.

오천 원을 내면서 버스기사에게 카드를 잊어버리고 안 갖고 왔다고 했더니 버스엔 거스름돈이 많이 준비되어 있으니 걱정 말라며 웃으신다. 버스를  탄 후 지하철을 탈 땐 환승이 되어 그냥 갈 수 있었을 텐데 1300원을 날린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쓱 통과하던 지하철 개찰구에서는 카드 없이 들어가려니 먼저 표를 끊어야 했다. 화면의 안내에 따라 도착지 연신내를 누르자 2250원을 넣으란다. 웬 차비가 이렇게 비싼 거야? 카드를 찍고 다닐 때는 금액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월말에 카드요금 청구서에서 교통비가 얼마인지 보게 되면 ‘이번 달엔 참 많이 돌아다녔네 ‘ 하며 흘려버리던 것이었다. 보통은 잘 보지도 않았다. 2250원이란 금액이 피부에 와 닿으며 안 쓰도 되었던 1300원이 더욱더 쓰라렸다.  

  출발지에서 가까운 역이어서인지 빈자리가 있었다.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던 전화기가 없었기에 처음엔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다. 담배를 끊고 난 후 나타나는 금단현상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에 밥 먹을 때조차 전화기를 손에서 떼어 놓지 못하는 아이들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생각했다. ‘전화기 없이 지내는 것이 어떠할지 시험해 볼 좋은 기회이구나.’라고.


  뭘 할까 한참 망설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들어가고 나가고~ 또 들어가고 나가고. 코끝에서 숨이 들고 나는 것에 집중하면서. 정신을 차려보니 옆 사람이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시 코끝으로 정신을 끌고 왔다. 이번엔 하나 둘 셋넷 하면서 호흡을 세기 시작했다. 분명 다섯까진 세고 있었는데 연신내역에서 남편을 어떻게 만날까 라는 걱정이 불쑥 떠올랐다. 어느 출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고, 도착하면 전화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역은 3호선 6호선이 만나는 곳이라 엄청 크고 출구도 많을 텐데 라는 걱정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다시 코끝으로 주의를 끌어왔다. 하나 둘 셋~. 아 도착하면 공중전화를 해야겠다. 전화기를 놓고 간 사실을 모르는 남편은 내게 전화를 했을 테고 칠칠치 못한 나를 두고  화를 낼 텐데 라는 생각에 또 빠져있었다.


  도착지에 내려 공중전화를 먼저 찾아야겠다며 개찰구를 빠져나오는데 바로 앞에서 남편이 빙긋이 웃으며 서 있었다. “전화기 놓고 갔다며?” 라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 말에 “당신은 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니 앞으로 까불지 마”라고 한다.


  전화기 없이 보낸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나는 전화기를 들고 있을 때와 똑같이 전화기에 매여 자유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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