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친정집 마루에 모처럼 활기가 넘친다. 십여 년 전 일본으로 떠난 동생 내외도 오고 보니 모처럼 다섯 남매와 그 식솔들이 거의 모인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한 달 전부터 준비 해온 고사 성어를 손수 붓글씨로 써서 손자 손녀들에게 나눠주고 일장 연설 중이시다. 얼마나 고민 고민해서 고른 문구 일지 짐작이 가지만 아이들이 겪을 그 지루함이 느껴져 웃음이 나온다.
손자들을 해방시킬 요량으로 치고 들어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엄마는 딸들과 얘기하랴 불에 올려놓은 음식에 신경 쓰랴 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기는 우리 또한 매 한 가지다. 묵혀 두었던 그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내야 하다 보니 말에는 두서가 없고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 보아라는 추임새로 말 허리는 뚝뚝 끊기지만 누구 하나 입을 다물지 못한다. 모두가 먹기에 바쁘고 말하기에 바쁘다.
시댁에선 시동생 내외가 여행 중이라 이번 추석은 조용한 집이 더 조용해졌다. 제사도 없는 집이라 우리 먹을 것만 챙기면 된다. 새벽잠이 없는 어른들은 벌써 기침을 하셨다. 길게 늘여봐야 두 시간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아침 준비를 새벽 4시부터 뭘 어쩌자는 것인지 30년째 의문이다.
일주일이나 되는 긴 연휴로 남해안으로 여행을 갔다. 반대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함께 한 이틀간의 짧은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편하게 집에 가만히 앉아 맛있는 것이나 먹으면서 지내지 뭣 하러 돈을 펑펑 써 대며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어른들은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인내를 보여 주셨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친정에서의 하루는 일을 했지만 즐거웠다. 그러나 시댁에서의 시간은 같은 일이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중간중간 훅 들어오는 시어머니의 잽이 아직 면역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간간이 인터넷에 떠 도는 젊은 며느리들의 시댁에 대한 거부감을 읽노라면 곧 사위와 며느리를 맞이할 나로서는 겁이 난다. 시어머니 욕을 안 한 게 아니니 나 또한 그 욕을 먹을 가능성은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지 않는가.
친정식구와는 3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한다. 거기다 열 달을 배 속에 넣고 피와 살을 나누어 준 부모들과의 갈등은 말을 해도 안 해도 스르르 녹아 나는 바탕이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함께하면서 나빴던 기억도 있었겠지만 보듬고 안아준 우리라는 뗄 수 없는 동질감이 어지간한 갈등쯤은 우스워 보이게 한다.
거기에 비해 시부모와의 관계는 인위적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남편일 뿐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인간관계는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피와 살을 나눈 사이도 아니며 보듬고 동지애를 키울 2~30년의 세월을 함께 하지도 않은 채 결혼한 당일부터 이러네 저러네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아야 하고 해야 할 의무만 짊어진다면 즐거운 관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과 애정이 없는 관계는 힘들고 불편할 뿐이다.
그래도 그 과정이 어떠했던 난 30년의 긴 시간을 시어른들과 함께 보냈다. 바리바리 챙겨준 짐들을 차에 싣고 두 분이 문 앞에 나와 멀어지는 차를 보며 하염없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서운했던 그 마음들은 눈 녹듯이 녹아버린다. 좋았든 싫었든 함께 한 시간의 힘은 그렇게 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