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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ya Aug 21. 2017

우리 삶이 머물다 간 자리-더 테이블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온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흰 꽃을 보고 여자는 자리에 앉는다. 누구나 앉았다 갈 수 있고, 그 누구의 이야기가 머물다 가고, 그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인, 카페의 테이블이다. 


최근 사회에서 카페라는 공간의 의미는 많이 달라졌다. 음료를 마시기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음료를 마시며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 되었다. 

나의 삶과 그의 삶, 그녀의 삶은 한 공간에서 펼쳐지고, 서로의 삶을 의식하는 듯 관여하지 않으며 그렇게 카페라는 공간은 거기에 있다. 우리는 그 공간 속에서 남들이 보는 듯 보지 않는 우리의 삶을 풀어낸다. 그 삶은 솔직한 듯 솔직하지 않고, 솔직하지 않은 듯 솔직하다. 


‘더 테이블’ 은 그 공간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관객은, 들으면 안 될 것 같지만 들리는, 그리고 자꾸만 듣게 되는 그들의 삶을 옆에서 몰래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하얀 꽃이 놓인 테이블에 왔다간 여덟 명의 사람은 친절한 앞뒤 설명 없이 그들의 삶을 (가만히 앉은 채로) 주고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삶을 몰래 상상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곳이 카페의 테이블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말로 주고받지만 그 이야기는 솔직한 듯 솔직하지 않고, 솔직하지 않은 듯 솔직하다. 우리의 작은 세상처럼, 그곳의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이 교차한다. 


오전 열한 시, 

잘 나가는 연예인이 된 유진은 오랜 추억 속의 옛 남자 친구 창석을 만난다. 창석을 기다리는 유진의 모습이 설레 보였다. 하지만 아름다웠던 추억은 현재의 것이 아니었다. 

찌라시의 내용을 확인하며 그녀를 당황시키고, 동료들에게 본인의 허세를 자랑하기 급급한 창석과의 대화는 유진을 진실과 대면하게 한다.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었다.’는 창석의 말은 그가 멀리 숨어있는 직장 동료와 주고받는 눈빛에서 씁쓸한 거짓으로 변해버린다.

추억을 기대하는 유진과, 그녀에게서 현재의 것을 기대하는 창석은 그렇게 헤어진다. 과거의 추억은 아름다운 거짓으로, 현재의 만남은 씁쓸한 진실로 남았다. 그리고 테이블엔 진한 에스프레소와 씁쓸한 맥주가 남아있었다. 


오후 두 시 반, 

시선을 회피하는 경진과 그런 그녀를 진하게 보고 있는 민호가 앉아있다. 의미 없는 듯 주고받는 대화는 진실과 거짓을 담고 있다. 

몇 달 전, 하룻밤 사랑 후 연락이 없었던 민호에게 경진은 본인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가 않다. 민호는 본인의 진짜 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 어렵다. 경진이 건넨 민호의 시계와, 민호가 여행에서 경진에게 선물하려고 산 (매일 태엽을 새로 감아주어야 하는) 시계는 남녀의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듯하다.

 내가 더 사랑하는 것을 들킬까 봐 솔직함을 숨기는 여자와 그런 여자에게 너무나 날 것이라 당황스러운 솔직함을 던지는 남자는 그렇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그 뒤로 커피 두 잔과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가 있었다. 


오후 다섯 시, 

은희와 숙자는 거짓을 공모하고 있다. 몇 번의 결혼 사기로 맺어진 두 인연은 새로운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희는 베테랑인 듯, 준비한 거짓 가족 관계 정보를 숙자에게 알려준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어머니 역할을 부탁하는 은희에게 숙자는 돈 나올 곳이 없어 보이는 이번 결혼에 대해 궁금해한다.

은희는 잠시 후, 처음 보이는 듯한 수줍음으로, 대답한다. “진짜.. 좋아서 하는 거예요.” 잠시의 정적 후, 숙자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준비해주는 옷 말고 진짜 내 옷을 입고 가도 되겠냐고. 자기 딸이 결혼 때, 감옥에 있던 본인에게 해준 옷이 있다고. 진짜 어머니 이름을 사용해달라고 부탁하는 은희와, 그런 은희를 바라보는 숙자는 서로 거짓을 주고받으며, 솔직했다. 두 잔의 라떼는 따뜻했다. 


저녁 아홉 시,

 혜경과 운철은 오래전 연인이었다. 혜경은 곧 결혼하고, 운철은 그런 그녀를 슬프게 바라봤다. 혜경은 운철에게 결혼과 별개로 만나자고 한다. 운철은 거절을 ‘선택’한다.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다’는 혜경의 말처럼 진실을 따라가는 것만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삶일 것이다.

혜경의 솔직한 마음과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운철의 거짓된 마음 중에 옳고 그름을 판단 내리기는 쉽지 않다. 헤어지기 전, ‘어제도 너랑 자는 꿈을 꿨다.’는 운철의 마지막 솔직한 말이 공허했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을 뒤로 가벼운 듯 돌아서는 혜경과 아쉬운 듯 돌아서는 운철의 발걸음은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본인들만이 안다. 그렇게 내리는 비를 뒤로, 테이블에는 식어버린 커피와 남겨진 홍차만이 있었다. 


그렇게 카페는 문을 닫았다. 내일도 그렇게 다른 인생들이 테이블에 머물다 갈 것이다. 우리 삶의 진실과 거짓을 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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