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다
“그나저나 제가 그쪽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네?”
“아니 미국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안대 끼고 누워만 있었잖아요. 기내식도 안 드시고. 저 진짜 그 안대를 벗겨볼까도 했어요. 이 여자 죽었나 싶어서.”
소피아는 여자의 엉뚱함에 웃음이 났다. 방금까지 진지한 이야기를 하던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싶을 정도로 그녀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을 때처럼 해맑았다. 오히려 소피아는 임산부에게 불안함을 줬다는 게 미안해졌다.
“아, 미안해요. 제가 불면증이 좀 있어서 안대라도 해야 잘 거 같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소개를 못했네요. 저는 소피아 로렌스라고 해요. 도착할 때 다되니깐 인사하네요.”
“오, 이런 거 너무 좋아요. 뭔가 드라마처럼 자연스러운 만남. 근데 이름이 소피아 로렌스 라구요? 한국 사람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당연히 한국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한국말 정말 잘하신다"
“친부모님이 한국분이세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고요. 한국말은 꽤 오랫동안 공부한 덕분이죠”
“그러시구나. 저는 최민정이라고 해요. 한국에서 방송국 작가로 일하다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 간 케이스. 다들 부러워했는데 다시 아이 낳으려고 보니 아무래도 친정엄마 계신 곳에서 낳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한국 들어가는 거예요.”
소피아는 자신이 입양아라는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녀가 신기했다.
“예전에 임산부를 주인공을 한 소설을 쓰면서 조사한 적 있는 데 엄마가 느끼는 감정, 아이도 다 느낀대요. 민정 씨같이 좋은 엄마를 둔 이 아이는 행복할 거예요."
“어머, 그쪽도 작가예요?”
“네. 저는 소설을 주로 써요"
“소피아 로렌스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여자가 소피아 로렌스 작가 소설을 읽어봤을 리 없었다. 소피아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소피아의 소설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최근에는 한국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글쎄요. 소피아라는 이름이 워낙 흔한 이름이라”
“한국에는 그럼 친부모님 찾으러 오신 거예요?”
“아뇨. 휴가 차 온 거예요. 입양되고 한국은 이번이 처음이라 친부모를 찾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잘됐다. 제가 이번에 유명한 시사프로그램에 들어가요. 거기 피디랑 학교 친구인데 이번에 입양아 이야기 다룰 거라고 얼마 전에 미국에 촬영하러 왔었거든요. 자연스럽게 좀 도와주다 제가 이번에 한국 들어간다고 하니깐 아기 낳기 전까지만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입양된 분들 인터뷰하고 있는데 혹시 부모님 찾으실 거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민정은 재빨리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소피아는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엄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섣부른 기대는 접어두기로 했다.
엄마와의 만남을 위해 그동안 소피아는 끊임없이 한국어 공부를 해왔다. 엄마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은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두 달 남짓의 시절. 갓난아기였던 은수와 다섯 살 난 오빠 현수 남매가 미국 땅을 밟은 지 삼십 년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소피아 아니 은수가 한국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맨 몸으로 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은수의 짐은 많지 않았다. 한국행을 결정했을 때부터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만난 민정과 헤어진 후 은수는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그녀를 반긴 것은 졸음이었다. 마치 오랜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은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이 맨 먼저 들었다. 택시를 잡고 가까운 호텔로 향하며 그녀는 오랜만에 수면제 없이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