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분별 속에 살아간다. 지적인 사람과 무지한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선함과 악함, 보수와 진보, 우등생과 열등생...
분별은 금을 그어 세상을 경계 짓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경계를 만듦으로써 제일 먼저 경계에 갇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좋은 에너지와 나쁜 에너지의 분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너지의 질과 정보가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한동안은 세상에 살면서도 속세를 떠난 듯이 살았다. 도심에 나가는 일이 피곤해서 산 아래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피곤해서 가능하면 이메일과 전화를 활용했다. 뉴스와 드라마 같은 세상의 변화에 무심한 채 오직 마음의 평화만을 추구하며 살았다.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래서 내가 어느 때보다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내가 만든 경계 안에 갇혀 지내는 일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계기가 찾아 왔다.
어느 봄날이었다. 그 날 나는 결혼식에 초대되어 초록이 무성한 야외 식장의 풀밭 위에 앉아 있었다. 볕은 따사롭고 대기는 빛났다. 한동안 진행되던 예식 행사가 끝나고 축하공연이 이어질 차례였다. 예식이 전통 혼례로 치러졌기 때문에 축하공연도 사물놀이패의 한바탕 놀음이 이어졌다.
그런데 꽹과리 소리가 조화롭지 않았다. 다른 악기와 박자가 맞지 않아서 오히려 소음에 가까웠다. 모처럼 좋은 날,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모인 자리, 공연 또한 조화로워서 사람들의 흥을 돋우어 주면 좋으련만, 화사한 봄날의 대기를 깨뜨리며 울려 퍼지는 요란한 소리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꽹과리를 치는 상쇠의 손에 눈길이 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직 소리가 조화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동안 꽹과리가 가야할 박자를 마음으로 함께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꽹과리 소리와 상쇠의 손 이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깊이 집중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상쇠는 상기된 표정으로 신명나게 꽹과리를 두드리고 있었고, 조화로운 악기 소리에 공명하여 사람들도 한마음이 되어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나의 마음이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가며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인간이 무엇인지, 왜 내가 인간인지를 알았다. 동물적 속성을 떠나 신적인 속성을 향해 나아가는 긴 여정, 그 영혼으로서의 하루를 살고 있는 오늘의 의미가 분명하게 와 닿았다.
인간은 존엄한가요? 라고 물으면 대다수가 잠시의 지체도 없이 ‘당연하지요.’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바꾸어, ‘당신은 모든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고 있나요?’라고 물으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무엇이 이런 생각과 행동의 차이를 만들고 있을까.
인간이 존엄하다는 믿음은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가 형성되면서 탄생했다. 기독교가 탄생한 이후,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지어진 유일한 피조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중세 내내 그 특별한 권리는 오직 신의 선택을 받은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업이 발달하면서 등장한 힘있는 상인 계층은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이 신에게 선택된 소수에게 상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신의 아들로서의 권리를 갖는다는 천부인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평등할 권리와 자유로울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인해, 그 권리는 무엇보다 ‘절대군주와 교회’가 지니고 있던 재산을 나누어 가질 권리를 의미했다. 거창한 명분과 달리 실질은 ‘사유재산권’의 획득이었고, 피를 흘려 가며 혁명에 성공한 덕분에 사람들은 노동을 제공하고 대신 사유재산을 가질 권리를 얻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자유를 얻는 동안, 신은 죽었고 인간은 우주의 먼지가 빚어낸, 강아지와 다를 바 없는 물질이 되는 존재의 강등을 겪었다. 이제 신은 사라지고, 신이 준 권리만 남았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믿음은 아무런 토대 없이 인간의 기억 속에서 부유하는,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가끔 꺼내 들어야 하는 무기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시대를 떠받치는 윤리의 제1의 원리인 ‘인권’의 토대는 이렇게 허약하다. 우리 시대를 이끌어가는 철학은 이다지도 빈곤하다.
그러니 우리 문명이,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정신분열증적 혼란을 겪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명상으로 시작하는 아침에 우리는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특별한 존재로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일터에 도착하는 순간, 자본주의의 부품이 되어 고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엄성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은 빠르게 구석으로 밀쳐 버려야 한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나는 다시 국가를 이끌어가는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회복해, 온갖 정치적 상황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듯 의견을 토해내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러니 도대체 나의 정체성과 자존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나도 그렇게 살았다. 인간이란 한없이 대단하지만 동시에 하찮았고 어떤 때는 고결한 사랑을 체험하며 고양됐지만, 때로는 작은 이익 앞에서 동물 만큼이나 본능적이고 치졸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차피 인간은 이런 것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자위하면서 존재론적 공허함을 망각 속으로, 망각 속으로 밀어 넣으며 살았다.
그런데 그 5월,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야외 결혼식장 마당에서 나는 갑자기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물론 나는 정말로 인간이 지어진 것인지, 진화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생을 살기 전에도 나는 무수한 시간 동안 존재했고, 그렇게 존재하며 쌓아온 지혜와 힘을 바탕으로 세상에 창조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특별한 존재, 동물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동물이 본능으로 처리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는, 바유컨대 엄청난 양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마음)를 바탕으로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사려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다. 그를 바탕으로 이 생을, 그리고 세계를 전과 같지 않은 특별한 시공간으로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다. 아마도 나는 이 존재적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무수한 영혼의 시간을 거치며 지혜를 쌓고 진화해 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환경에 끌려가는 대신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특별함은 지식을 쌓거나 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인공지능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정말로 특별한 것은 우주의 양자장에 더 나은 정보를 새길 수 있는 의식의 힘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새겨 놓은 정보를 읽고 해석하여 더 나은 창조를 이루어갈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 물질적이고 동물적인 차원을 넘어 신적인 지혜와 힘을 지닌 존재로 나아가는, 말 그대로 동물과 신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인간人間’.
그 날의 경험 이후, 세상을 보는 나의 시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을 지탱해 가는 것은 지식인도, 정치 권력자도 아니었다. 사람은 선해야 한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마음의 힘을 베풀며 사는 보통 사람들, 정안수를 떠놓고 자식이 잘 되기를 정성으로 빌던 어머니들의 사랑, 그렇게 모인 작은 마음의 힘들이 마치 바다 속에서 계속 소금을 뿜어내는 소금 맷돌처럼 세상을 정화하고 지탱하는 힘이었음을 그 오월의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이름 없는, 아무도 모르지만 세상을 맑히는 요정으로 살고 싶어졌다(나의 필명이 아줌마인 데는 이런 사연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름 없는 아줌마로 살아가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사람들은 자존감을 이야기한다. 자존감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소비하고 타인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의 자존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이름이나 장식으로 나를 치장하지 않아도 존재의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나는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 그것이 있으면 어떤 순간에도 자존은 무너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게 된다. 타인이 무례하고 구는 순간에도, 오히려 그 오만하고 좁은 식견 때문에 그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추울까를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그래서 그가 알아주든 말든, 그에게 따뜻한 마음을 선물할 수 있다. 그리고 혼자 요정이라도 된 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 날 이후, 나는 정말 요정이라도 된 듯 내 마음의 힘을 실험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간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차갑고 냉소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그들 탓이 아니라 내 탓이었다는 것을. 인간은 누구나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이기심과 이타심의 씨앗을 품고 있다. 원래 악하거나 선한 사람은 없다. 다만 내가 그 마음에 어떤 물결을 일으키냐에 따라 그는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본능에 따라 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 전체를 사려하면서 순간순간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해 갈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다.
간혹 TV를 보다가, 잔뜩 품격 있는 자리를 마련해 놓고 ‘고기의 육즙’이 어떠니를 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 부조화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강아지들처럼 솔직하게 본능에 충실하든지, 인간다운 사려를 지녔다면 우리의 육식으로 그 동물이 놓쳐버렸을 진화의 기회를 애도하며 삼갈 일이지, 무슨 예술 작품이라도 대하듯 생고기를 앞에 두고 육즙을 논할 일인가. '고기가 진리'라며 게걸스러운 입맛을 다실 일인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같은 인간 동료로서 진한 슬픔을 느낀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대체 왜 인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