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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Apr 24. 2019

말하지 못한 것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

제목만 보면 엄청 거창한 비밀이 있을 것 같지만 실은 별 거 아니다.

난 미리 말했기에 죄가 없다.


우리가 알게 된 경로는 회사다.

오빠의 첫인상은 딱딱했다.

회의하는 자리에서 처음 봤고 옆에 있던 동료가 상냥한 탓에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그때는 당연히 이런 관계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속으로 저 사람이랑은 친해지기 힘들겠다 생각했다. 참고로 오빠는 내 첫인상이 좋았다고 했다.(미안해야 인지상정인가..)


그렇게 첫 만남 이후 회식 자리에서 두 번째 만났다.

그 당시 오빠는 제주에 살고 있었고, 같은 팀이었지만 왕래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첫 만남 이후 오랜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팀 인원이 20명 정도였고 테이블이 네 명씩 여러 테이블로 나뉘었는데, 어쩌다 보니 같은 테이블 대각선에 앉았다.


회식 장소는 참치집이었다. 회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날따라 내키지 않은건지 맛이 없던건지 분위기가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던건지 영 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집에 가고싶다 싶을 때쯤 뭔가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싶어서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쳐다봤다. 오빠였다.


그래, 쳐다볼 수 있지. 그런데 보통 무의식으로 쳐다보다가 상대와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옮기는 게 보통인데, 이 사람 보소. 뚫어져라 눈을 안 피하고 쳐다본다.


이상했다. 왜 저러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진짜 이상했다. 회의할 때 그렇게 딱딱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못 먹느냐며 친절한 말투로 대했다. 그 당시 생각으로 '아 일할 때는 까칠하지만 평소에는 사람들한테 친절한 타입이구나'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빠는 그다지 상냥하지도 않고, 과묵한 타입에 오히려 까칠하고 허튼 짓은 안 하는 무거운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 포인트에서 오빠에게 관심이 생긴 것 같다.


2016년 4월 즈음, 나는 제주 여행을 계획했다.

그 사이 몇 번의 개인적인 연락이 오갔고, 어찌어찌해서 제주 여행 중 하루를 함께 놀기로 했다.

목적지는 가파도.


오빠는 제주 시내에서 와야 했고, 나는 근처 게스트하우스에서 배를 타러 나왔다.

섬에 섬이니까 한산할 거라 생각했던 건 큰 오산이었다. 가파도 청보리 축제가 열리던 때라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표를 사기 위해 어마 무시한 줄에 섰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땡볕에 아주 취약하다. 그런 곳에 한 10분쯤 있었을까? 저 뒤쪽에서 카키색 맥코트를 입은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오빠인 걸 확인했는데 아는척하지 않고 휙 뒤돌아섰다.


결혼을 앞둔 요즘, 오빠를 가만히 보고있다보면 이상하게 가파도에서의 그 낯선 남자가 뒤에서 걸어오던 이미지가 겹쳐진다.


어쨌든 그 날 우리는 섬 구경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시골 분위기 풍기는 곳에서 점심도 먹고, 제주 시내로 올라가서 영화도 보고 맥주도 마셨다. 하루를 그렇게 온전히 다 보내고 난 뒤, 다시 서귀포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생각했다.


‘뭔가 이 사람이랑은 잘 안될 거 같다.’


직감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한 번의 제주여행을 끝으로 개인적인 연락을 끊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가 제주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회사 자리가 코 앞이었기에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었고, 사실 그때는 이미 마음을 접은 후라 가까이 생활하는 게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났다.

2017년 겨울, 출근하고 자리에 앉아있는데 아침에 커피 한 잔 하자며 연락이 왔다. 내 기억으론 개인적인 연락을 끊은 뒤 먼저 연락이 온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커피를 한 잔 사오고, (바로 반대편에 앉아있는데) 또다시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에 밥이나 술 할래요?'


네 이 녀석, 보통이 아니다.

1년 반 동안 아무렇지 않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말하지. 또 관심 보이고 나중에 아니라고 할 건가. 근데 그냥 커피도 아니고 술이라고 했다. 술? 뭐? 술이라고? 취하자고? 아니 뭐 꼭 취하지 않더라도 둘이 술이라니. 그럼 난 뭐라고 말할까. 지난 과거 나를 속 썩게 했으니 괘씸죄로 '네? 왜요?'라고 하며 무안을 줄까. '음.. 잠시만요.'라고 뜸을 들일까. 그렇게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오만가지의 케이스를 생각했고, 내 선택은

'좋죠~'였다.


하.. 나란 녀석... 좋죠라니.. 그것도 물결 표시까지.. 밀당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그 날 우리는 사당 전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마셨다. 물론 2차가서 대포인지 뭔지하는 술도 마셨다. 무슨 술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좋은 인연일까 싶어 붕 떠있던 내 마음을 이내 섭섭하게 만들었던 그가 밉고 한심했는데, 그 1년 반치의 섭섭했던 마음이 자존심따위 없이 사라졌다.


그 이후 우리는 많은 일들을 겪으며 단단해졌고, 짧고 긴 여행도 다녀왔고, 결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서로의 부모님을 만나 뵈었고, 식장을 예약했고, 반지를 맞추었고, 상견례를 무사히 마쳤고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두서없이 길어졌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동안 친한 동료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조심스러웠고, 그랬기 때문에 때로는 아닌 척 거짓말해야 했고, 눈치 아닌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그런 말이 있다. 세상에 사내연애는 당사자 빼고 다 안다고.


사실이었다.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고 있었다. 완벽한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조만간 결혼 소식 알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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