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읽는 책 │ 나의 살던 고향은
학창 시절 저는 미니홈피에 매일 다이어리 10개를 쓰고
홈피 메인에 있는 마이 룸을 매일 조금씩 다르게 꾸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매일 미니홈피를 들어가면서 기록을 남겼었어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방명록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찍은 사진들을 앨범에 올리고 함께 웃곤 했었죠. 중, 고등학교 시절의 사진이 잔뜩 보관되어 있는 미니홈피, 가끔 그 홈피가 저의 앨범 같기도, 작은 사이버 고향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보고 참 반가웠어요. 하나하나 찍어 그린 도트 그림들이 마치 그 시절 미니룸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오늘 밤에 읽는 책은 <나의 살던 고향은>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은 성이 두 글자라 종종 오해받는 훈이의 개인 사이기도 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었던 일들에 대한 추억을 담은 책입니다. 가장 먼저 도트로 그려낸 그림들이 눈을 사로잡는데요, 한 장면 한 장면 훈이의 풍경을 이루는 컷들을 보며 오래전 추억을 담았던 홈피가 떠올라 기분이 몽글몽글 하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주인공 '훈이'의 정겨운 고향, 시골 할머니 집,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일상적이면서 따뜻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모두가 그러하듯 기억에는 다정하고 포근한 날들도 있지만, 어렵고 슬펐던 날들이 있습니다. 물론 훈이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고요.
재혼 가정에서 자랐다는 개인사,
출신 지역으로 인해 느낀 소외감,
군대에서 일상화된 폭력 등.
지금 돌아보면 아프기도 슬프기도 한 기억들을 다루면서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훈이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느껴집니다.
오래된 추억으로 크게 포장하지도, 그렇다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빠지지도 않고 주어진 오늘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이어지는 훈이의 이야기는 한 장 한 장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읽는 이에게 성장과 세계의 확장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언젠가 인터뷰를 하게 되었을 때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었다.
"왜 도트 그래픽으로 만화를 그리시나요?
그땐 이렇게 답했었다.
"도트는 뭔가가 쌓여서 완성되는 게 레고랑 비슷한 느낌인데요.
레고에 비하면 도트는 시간이 가도 더러워지거나 변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레고는 둘 공간도 필요하잖아요.
저에게 도트 그래픽은 컴퓨터 안에 들어있는 저 만의 방 같은 거예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삶의 어느 순간들을 포착해 도트로 하나하나 찍어 만들어 낸 책. 한때 도트 그래픽이란 컴퓨터 안에 들어있는 자신만의 방 같다던 작가님의 대답은 꼭 그만의 대답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며 들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가 때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 된다는 건 우리가 어쩌면 같은 시대를 지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의 마지막 즈음엔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일을 돕는 것만으로 할머니에게 칭찬받던 훈이와는 다르게 매일 일하지 않는다고 혼이 나던 누나의 모습, 의심 없이 모르는 차를 얻어 타거나 교내 신문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자신의 모습.
어느 순간 훈이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돌아보며 정상성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며, 훨씬 많은 기준과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되며, 지난날의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가족과 관계를 다른 시선으로 볼 수도 있게 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은 누군가의 추억을 담은 책으로 시작했지만, 책장을 덮을 때에는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지나 온 세계를 다시 이해하며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화단이 없어진 마당에서
할머니의 성씨도
가족들과 달랐다는 걸 새삼 생각했다.
가족이 누구인지는
성씨 같은 걸로 정해지는 게 아닐 것이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지난 시절을 어떻게 돌아봐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모두 다 포장하지 않으면서도 겪은 불행에만 빠지지 않는 것, 담담하게 지난날을 추억하면서도 그 속에서도 다시 배워나가는 것.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세상의 불행에 관심을 끄지 않으면서도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
<나의 살던 고향은>처럼 바로 이런 시선이 아닐까, 지난날의 추억과 감성을 건드리면서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책을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클로즈업이 없으면 모든 인물에 공평하게, 심지어 배경의 무생물에까지 시선을 주게 된다. 선우훈 작가의 도트 그래픽 작업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문구점 집 막내아들 선우훈이 어른이 되어서 가족이나 친구, 혹은 자기 자신과 복작대던 시간을 도트 그래픽 만화로 그렸다. 그리움과 닮은 감정이 때로 슬픔이고 때로 웃음인 [나의 살던 고향은]은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울리는 작품.
특히 한 컷이 페이지 가득 등장할 때면 인구밀도가 낮은데도 숨 막히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다혜 『씨네 21』 기자, 작가
밤에 읽는 책
마음이 쓸쓸한 어느 일요일 밤,
침대에 앉아 읽기 좋은 따듯한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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