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읽는 책 │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저는 영화관을 좋아합니다.
깜깜한 영화관에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 안전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저에게 영화관은 안전한 공간. 누구도 저를 주목하지 않는 공간. 화면 속 쏟아지는 주인공들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잠시 숨겨놓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외국에서 오래 공부하던 시절. 낯선 언어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만 쌓여갔던 때. 하루는 홀로 대형 백화점 안에 있는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눈이 펑펑 오는 날, 몇 백 석은 되어 보이는 큰 극장.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안전한 것 같아서
눈물만 펑펑 쏟아내고 왔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처음 한 번은 극장 안에서, 그다음 한 번은 극장 밖에서
얼마 전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리곤 오래전 그날을 떠올렸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밤에 읽기 좋은 책, 밤책은 이동진 영화 평론가님의<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입니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는 영화 평론가 이동진의 지난 20년간 평론을 모은 책입니다. 1999년 개봉한 「벨벳 골드마인」부터 2019년 개봉한 「기생충」까지 지난 20년간 발표해온 평론과 새롭게 쓴 평론을 합해 총 208편을 모아 엮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꺼운 책. 그가 쌓아 온 시간의 겹이 느껴져 대단하기도 하고, 하나를 꾸준히 쌓아온다는 게 어떤 걸까 생각하게 됩니다.
두꺼운 책을 손목에 힘을 주고 펼친 다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 봅니다. 수많은 영화들이 담겨 있어서 그런가, 영화관 한가운데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자꾸만 편안해졌습니다.
제가 보았던 영화를 중심으로 그가 기록한 정돈된 영화의 순간들을 읽는데, 아 맞아 이 영화를 보며 나도 이렇게 생각했었어-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어- 다시금 기억 속에 있는 영화를 확장하게 됩니다.
어느 늦은 밤 침대에 앉아 밑줄 그은 몇 문장을, 몇 장면을 소개합니다. 이 문장 한 곳에서라도 마음이 움찔했다면, 어쩌면 여러분의 영화도 다시금 시작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요.
그러니까 삶의 모든 시절에는
그 시절만의 치열한 문제가 있다.
세월이 흐른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저 문제가 달라질 뿐이다.
그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아무리 절실하고 간절해도
아이들은, 그들은, 우리들은, 자꾸 미끄러진다.
다만 「우리들」은 손톱 끝에 겨우 남은 봉숭아 꽃물을 바라보며,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다짐하고 있을 뿐이다.
- p.329, 「우리들」 중에서
그리고 노래가 멈추고 여자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
관객은 깨닫는다.
설령 영화에서 구원의 사다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어떤 영화는 깊은 우물 같은 위로를 건넨다는 것을.
극 중에서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는
드라마틱 한 굴곡이 없다.
영화 속에서 남자나 여자가 혼자 노래하는 순간의 쓸쓸함은
둘이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도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노래할 때 빈 하늘을 외로이 떠돌았던 영혼들은,
둘이 함께 노래할 때 지친 나래를 접고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음표 위에서 잠시 쉰다.
그걸로 족하다.
그게 이 생에 허락된 휴식이라면.
- p.682~683, 「원스」 중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물의 모양(The Shape of Water)'은 따로 형태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자일스의 내레이션에서는
오래된 시가 인용된다.
"그대의 모양이 무언지 알 수가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뿐."
한 사람을 사랑할 때,
세상의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것처럼 느끼려면
그 사랑은 무정형일 수밖에 없다.
사랑의 모양은 이렇다고,
진짜 사랑의 형태는 바로 이래야 된다고
특정해서 규정하는 순간,
사랑의 신비는 휘발되고
그 규정 밖의 사랑들에 대해서
폭력이 시작된다.
'괴물'과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이 영화는
그를 통해 세상 모든 모양의 사랑을 축복하려 한다.
- p.133, 「셰이브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중에서
어쩌면 일기처럼, 때로는 에세이처럼 읽히는
문장들을 산책하다 보면
내가 안전하다고 느꼈던 그 영화관에 들어온 느낌이 듭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
그들의 비극에 숨어 나의 슬픔을 숨겼던 순간,
내게도 저런 일들이 생긴다면 어떨까 상상하던 순간.
그 순간들은 영화관을 벗어나서도
제 삶에서도 오랜 여운으로 남곤 했습니다.
어쩌면 영화는 이렇게 두 번 시작하는가 봅니다.
처음 한 번은 극장 안에서, 그다음 한 번은 극장 밖에서.
그곳에서 얻은 어떤 감정을, 희열을, 위안을 잔뜩 안고서
제 삶으로 돌아와 연료로 쓰며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
이번 주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밤에 읽는 책
마음이 쓸쓸한 어느 일요일 밤,
침대에 앉아 읽기 좋은 따듯한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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