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이 새겨진 플랭카드가 대문짝만 하게 걸렸다.
2006년 유치원 교사 임용고시 합격자 000.
미래가 보이지 않던 사립 유치원 직장을 그만두고, 임용고시를 보기로 결정하기까지 단단한 마음과 용기가 필요했다.
당시 전년도 교사 임용인원은 부산지역에는 0명 , 가장 많이 뽑는 경기지역에는 20명, 다른 지역도 다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경쟁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4년제 이상 유아교육과 졸업생 혹은, 교육대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직접 꾸리고 지도하는 스터디그룹소속 4학년 학생들.
나는 2년제 유아교육과 졸업에 방통대로 학사를 마친, 실력을 알 수 없는, 3년간 공부가 전무했던 퇴직 도전자. 그런 상황에 임용고시에 도전하기로 한 결정은 참으로 무모했지만, 실전 생계형이었다.
아버지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돈 앞에서 정확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겨우 전문대학이라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씨알도 안 먹힐걸 알았지만 용기 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 한 달에 20만 원 딱 일 년만 도와주세요. 꼭 붙을 거예요. 만약 떨어지면 더 이상 공부하지 않을게요. ”
“그게 되겠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돈 모아서 빨리 시집이나 가”
“ 집세 10만 원 외 10만 원으로 버텨볼게요. 제발 일 년만 도와주세요”
겨우 허락된 일 년간 20만 원은 200만 원처럼 느껴졌다.
3년간 직장을 다녔지만, 꼭 필요한 학원비와 교재비를 빼고 나니 손에 쥔돈이 없었다.
어두운 미래를 바꿀길은 오로지 임용고시 합격뿐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내 편에서 잘한다고 손뼉 쳐 주지 않았다.
‘네가 되겠어? 공부는 핑계고 일 년 쉬는 거겠지.’ 식이었다.
헝그리정신으로 오로지 공부만 했다.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도 일 년에 두 번만 만났고, 친구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았다. 그리 좋은 머리를 가지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해본 적이 없었지만, 노력과 의지는 판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꼭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보통 두세 번은 시험을 쳐야 한다고 들었지만, 도전의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죽어라 공부만 했다. 공부만 하다 보니 우스운 현상이 생겼다. 책의 존재가 고마워지고, 책이 친구 같은 그런 기이한 상황.
도서관과 집을 자전거로 오가며 교통비를 아끼고, 초라한 도시락으로 점심값을 대신했다.
마지막 한 달을 남기고 지친 스스로에게 선물했던 300ml짜리 서울우유를 마시며 울컥하기도 했다.
1차 합격 통지, 평소 연락하지 않던 서울 친척집에 짐을 싸들고 들어갔다. 엄마의 힘이었다.
한 달간 2차 시험 준비만을 위해 달렸다. 노량진을 오가면 1차 합격자들과 악착같이 스터디를 했다.
어디에서 자고 먹는지 모를 정도로의 집중이었다.
2차 합격통보를 받았다. 임용고시 합격 통보였다.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기너머로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나도 울었다. 울음의 이유는 서로 같았을까.
10개월의 도전을 성공으로 해내고, 뜨끈한 목욕탕으로 향했고, 벌거벗은 모양으로 쓰로지고 말았다.
다행히 응급차가 오기 전에 깨어나 벌거벗은 몸으로 병원 가는 수모를 막았다.
콧등에 시퍼런 멍자국과 함께 퉁퉁 부어있는 얼굴이 보기 흉했다.
몸무게가 45kg였다. 10개월 만에 6kg가 빠진 것이다.
몸무게 빠진 것으로 따져보면 임용교시를 준비했던 그 10개월이 나에게 가장 큰 도전적인 순간이다.
아버지의 부정적인 생각에 대한 도전이었고, 내 삶을 개척하고자 했던 자발적인 도전이었다.
또 내 인생에서 가장 나를 사랑한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주어진 대로 살려고 하고,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겁쟁이다.
하지만 한계에 부딧히고, 자존감이 바닦을 칠때마다 내가 이루어 보았던 이 도전을 상기하게 된다.
그러면 자신에 대한 신뢰감과 효능감이 조금씩 회복된다. 비록 교사생활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지만,
이 도전과 성공의 경험은 내 인생에 있어 양질의 거름이 되어주는 값진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