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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쉘 Jun 22. 2023

장자, 나를 깨우다를 읽고.

독후 에세이

오래된 인연과 연을 끊게 되는 일이 있었다. 매몰차고 정 없이 두 동강을 내었다. 나와 상대에게 또 그 관계에게 참으로 잔혹했다.  내 성심은 관계의 질을 판단하려 들었고,  지식은 이질적인 상대의 삶의 철학과 관계의 본질이 다름을 가려내었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결단이 나야 모두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말이다. 학창 시절 친구와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을 때 그랬고, 아집이 강해지면서 내 상식선에서 벗어 나는 가까운 사람과 그런 일이 있었다. 스스로를 위해 잘한 일이라고, 썩어 들어가는 마음을 잘 챙긴 것이라고, 떠돌아다니는 심리학이론들에 위안을 얻었다.




“옳다 그르다 하는 편견을 무너뜨리고 편안히 천균에 머물러야 한다.”  


“원숭이들은 성심이라는 견고한 성에 갇혀 있었다. 성심은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고,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굳건한 믿음이며, 타인의 접근을 완곡히 거부하는 아집의 성이다. 그러므로 시급한 것은 이러한 성심을 깨뜨리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천균’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균’ 이란 저절로 그러한 자연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감각을 지닌 조화로운 마음이다.”



장자의 글을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냥 내버려 두었더라도 자연스럽게 두 갈래로 갈라질 관계들을 억지로 단칼에 잘라내었 던 것은 아니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급했고, 무엇을 그렇게 참을 수 없었는가.


신이 내린 듯 한 맑은 물을 만나도, 보석과 같은 돌들을 지나도 잠시 멈추어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시간이 없는 여행자 물고기가 있다.  그저 물살에 떠밀려 헤엄만 칠뿐 , 꼬리만 흔들뿐 , 그것을 즐길 여유도, 마음도 없다. 그것이 과연 양질의 여행일까? 도착지에 다달했을 때 물고기는 물고기로의 기능이 남아 있기나 할까?


잘해보려고 더욱 애를 쓰다 보면 오히려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애쓰지 않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쓰임이 어디쯤 에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때,  나는 그저 열심히 한다. 부딪히는 상황에서 장거리 수영을 하듯 허우적거리며,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한계에 부딪혀 숨통이 막히기도 하면서 결국 그렇게 끝까지 완주를 한다.  마음을 돌보지 않은 채 성공된 완주는 자랑스러움과, 공허함이 어김없이 함께 찾아온다. 빈틈없이 쓰임에 대해 생각하고,  완주를 위한 헤엄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장자의 가르침처럼 그냥 한계를 인정하고 순리를 편안히 받아들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마음을 대상으로 그것을 부지런히 닦고 올바르게 기르는 행위, 이것이 바로 일반적 의미의 수양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은 적극적으로 잘 보살피고 키워야 할 대상이 된다.”


“안명론-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내 맡기고 거기에 편안히 머물라 “


“안시처순 - 편안히 때를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른다. “




 장자의 글 중 ‘애태타의 비움’ 부분이 잠시 독서를 멈추 게 했던 이유는, 그런 애태타가 존경스러워서도, 시기해서도 아니었다. 나에게도 ‘비움’ 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렸다. 어두워진 나의 삶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허우적 거림이었고, 스스로를 구하고자 했던 간절함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잘 한일도 못한 일도 그저 흘러갔다. 조금만 더 여유를 가져도 되었을 일들에 두통이 올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를 밀어붙였다.  욕심을 비워낼수록 즐거움이 남고, 욕심을 채울수록 아쉬움이 남았다.



“흐르는 물은 제 흘러가기 바빠 남을 비춰주거나 돌아볼 여유가 없다. 비춘다 해도 왜곡된 모습만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고요한 물은 늘 남을 비춰주고 돌아본다. 애태타는 흐르는 물이 아니라 고요한 물이었기에 사람들이 머물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애태타를 통해 각자의 자연적 본성을 회복했을 것이다. “



나는 엄마이기도 함으로 때로는 고인 물이 되어야 한다. 내가 흘러가면  아이들도 따라 흐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애태타의 이야기를 읽고 보니, 비움의 형태가 함께 해야 흐르는 물도 빛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과 죽음은 운명이니, 마치 밤과 낮이 일정하게 번갈아 갈마드는 자연현상과 같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 이런 게 모두 사물의 참모습이다.”



비록 장자는 삶과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흘러가는 대로 홀연히 보내라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감동하고, 공감하고 또 반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홀연히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삶이 좀 고달픈 지연정, 순간의 고통이 클 지연정 고인 물보다는 흘러가는 물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때때로 비우고 수양하면서, 스스로에게 또 다른 이에게  조금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고 자주 말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열심히 변화하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가겠다고 말하고 싶다.

장자의 말처럼 일상을 살되 일상에 매몰되지 않게 … 변화를 추구하되 수양하며 살다 최후에는, 나의 보석들에게 내 삶은 최고였어라고 유언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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