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I OPEN 2023 in New Zealand
컨퍼런스.. 이름만 들어도 근사한 그곳에 갔다. AGI OPEN 2023 in New Zealand.
마흔을 넘겨 한 분야의 전문가이자 발표자로서 참여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배우는 입장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디자인 컨퍼런스라니… 티비드라마나 유튜브 혹은 테드 톡에서 보더 그런 무대가 내 앞에 펼쳐졌다.
우리 집 티비의 100배 정도 되는 커다란 스크린이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와이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은데 절대 안정감이 느껴진다. 커다란 스크린은 무대를 가득 채우고 그 표면에는 무빙 이미지와 무빙 텍스트가 계속 바뀐다. 와 스케일이.. 이런 곳에 참석한 내가 덩달아 스케일이 크고 멋지게 느껴졌다.
오랜 전 교사시절 교사연수장소가 기억났다. 그곳들은 대강의실에서 공부하는 분위기로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하느라 적기 바빴던 곳, 환한 분위기에 발표자, 연수 참여자 모두 점잔은 정장이나, 세미 정장차림이었는데, 이곳 디자인 컨퍼런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겉모습부터가 자유롭고, 다양했다. 점프수트를 입은 진행자, 크록스를 신은 발표자 등등 약간은 보수적인 집단에서만 속해 있었던 내가 본 그런 풍경은 디자이너들이 모인 컨퍼런스를 오기 위해 뭘 입어야 하나 검색도 해보고, 고민을 많이 한 나로서는 문화 충격 그 이상이었다. 그러면서 과하지 않은 나의 의상과 겉모습에 안도를 했다.
무대중앙에는 토크쇼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안해 보이는 라운지가 세팅되어있고, 오른편에는 발표자가 서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단상이 왼쪽 편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빈백에 앉아 노트북을 하나씩 무릎에 얹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관객들 괴 소통하는 글을 커다란 화면에 띄우고 지우고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분명 네이티브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나는 아직도 겉모습으로 네이티부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이민국에 사는 어리석은 이민자다) 어쩜 저렇게 영타도 빠르고 스펠링도 틀리지 않을뿐더러 단어하나로 온 관객을 웃게 하는 센스까지 갖추었을까…. 정말 이 세상에는 온통 능력자뿐인 것 같다.
스피치가 시작됨을 알리는 조명이 조절되었다. 화려한 무대의 조명과 커다란 화면은 집중도를 최상으로 높여주었다. 한편 관객의 자리는 깜깜해져서 피곤한 사람들은 한숨 푹 자기에 알맞은 조명처리였다.
이 세상에는 훌륭한 디자이너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마흔 넘어 시작한 나는 정말 늦은 걸까.
처음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분명 취직이 목적이었고, 어떤 디자인을 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한국에서 학원을 다닌다는 기분으로 기술을 잘 배워 예쁜 것을 만들어 돈 버는데 쓰임이 되면 된다고 생각했고, 기술을 빠르게 습득해 이 사회에서 한 구성원으로서 잘아보고자 했던 목적이외에는 디자이너로서의 마음가짐은 없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는 진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사용자를 깊이고려하고, 환경을 생각하고, 대용량 쓰레기를 생산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디자이너... 머릿속에 있는 상상의 세계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는 디자이너...자꾸 욕심이 생긴다. 자식 교육을 위해 돈 벌어야 되는데 말이다. 무대 위에 서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보다 정신을 차리며, 취직이라도 되면 감사한 일이라 생각했다.
‘학생 때는 원래 큰 꿈을 꾸는 거니까. 내 눈앞에 펼쳐진 큰 무대 위에 오른 큰(?) 사람들처럼 되어보고 싶다는 꿈을 꿔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내 마음은 확실히 이십다가 맞아 ‘ 며 토닥토닥해 주었다.
컨퍼런스에는 세계곳곳에서 온 재주꾼들이 널뛰기 그네뛰기 덤블링까지 하듯 각각의 주어진 주제로 다양하고 색다른 시야를 선보이며 스피치를 멋지게 끝낸 후, 무대를 오르고 내려오는 것을 반복했다.
벨기에, 미국, 영국, 중국,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폴, 한국, 호주, 뉴질랜드, 베트남, 일본 그리고 중국 등등 각 나라 국가대표 디자이너들이 모조리 나와 자신들의 디자인을 뽐내고, 전문적 지식을 배경 삼아 그 지식들이 보일 듯 말 듯 가벼운 언어를 써가며 듣는 이와 쉽게 소통하는 설득력 있는 스피치를 하는 모습의 디자이너들을 볼 때면 눈이 반짝반짝 해졌다.
첫 번째로 무대 위에 등장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는 일본에서 온 Taku Satoh였다. 디자인 세계를 기본만 배운나는 그가 얼마나 유명한지 얼마나 훌륭한 디자이너인지 전혀 몰랐다. 그뿐이 아니라 사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 Paula Scher와 일 학년 때 북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리서치를 했던 뉴질랜드 타이포 그래피 디자이너 Kris Sowersby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그 둘을 실물로 보러 왔다고 하면 딱 맞았다.
Taku Satoh의 디자인 철학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았다. 'HODO-HODO, JUST ENOUGH DESIGN'. 그의 디자인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유일하게 책 사는데 돈을 썼다. 화려하고 두껍고, 무거운 다른 디자이너들의 책에 비해 그의 책은 단돈 $20에 작고 하얀 단초로운 책 디자인이 그의 철학과 맞아떨어지는 북 디자인 같아서 손쉽게 그러나 고퀠리티의 책을 구입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한국에서 오신 안상수 교수님의 발표도 눈에 띄였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는데 알고 보니 영화감독 홍상수와 착각을 한 것이었다. 파주 북시티 PATI라는 디자인 교육기관을 설립하시고 운영하는 이야기들을 이미지들과 함께 영어로 발표를 하셨는데, 같은 한국인이라 그런지 더 귀를 활짝 열어 응원하는 마음으로 듣는 나를 보았다. 영어로 발표하는 모습이 편하게 보이지만은 않아 마음이 쓰였다. 아줌마 오지랖이 발동하여 '쉬는 시간에 기회가 된다면 다가가서 한국말로 수다를 떨어드리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교수님도 나와 같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나도 아직도 영어가 불편해요..'.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이튿날 쉬는 시간 그분을 발견했고,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부탁드렸다. ( 한국말 들으시니 마음이 좋으시죠? 속으로 생각하며) 내가 스스름 없이 다가가자 뒤따라 우리 학교 친구들과 렉처러 두 분이 우르르 몰려들어 함께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조금 나눌 수 있었다. 오랜 이민 생활에서 나온 '감'이랄까.. 안상수 교수님은 일상영어를 편하게 사용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에서 내가 영어를 써야 할지 한국말을 써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의 괜한 오지랖과, 짧디 짧은 시야에서 나온 쓸데없는 공감대 형성이었다. 한국사람에 대한 이런 마인드를 버려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다 좋았는데, 이놈의 컨퍼런스에서는 물 한잔, 커피 한 장을 주지 않았다. 마침 이틀 전부터 커피를 끊어보리라 다짐했기에, 커피는 마시지 않을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점심식사후 늦은 오후에는 커피 금단현상이 왔다. 카페인 섭취 없이 깜깜한 곳에 앉아 부른 배를 안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고역이기도 했다. 오클랜드의 봄은 너무도 화창했는데 말이다.
이튿날 첫 발표자로 기다리고 기대했던 폴라 셰어 폴라 셰어가 나왔다. 폴라셰어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일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abstract 에도 출연했고, Pantagram 파트너 디자이너로서 오랫동안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녀는 나에게도 또 많은 디자이너들에게도 스타급이다.
화려한 그녀의 경력을 생각하며 그녀의 화려한 겉보습을 상상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체구가 작고, 뒷집 이모 같은 소탈한 분위기가 풍기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미국식 영어발음이 어찌나 잘 들리던지 ( 아마도 영어를 잘 알아듣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도와 정비례하는 것 같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녀의 스피치를 뒷받침하는 이미지들과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의 위상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오래 전의 작품인데도, 하나도 촌스럽지도, 뒤쳐지지도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텍스트로 구성되는데, 너무도 쉽게 접근하면서도 혁명적인 창의성에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에게 창의적인 디자인이란 정말 로 그렇게 쉬운 것일까.
다 끝나지 않은 컨퍼런스를 뒤로 하고, 집으로 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컨퍼런스의 시간을 계산하지 못하고 마지막 배행기시간에 맞춰 티겟을 끊었기 때문이다. 다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너무 아쉬웠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심한 바람으로 인해 비행기가 지연되었고, 한 시간 착륙이 미뤄지는 악몽을 겪었다. 2박 3일간의 짧았지만 행복한 순간들을 모두 수포로 돌려놓은 비행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꿈같은 시간들은 정리할 틈도 없이 골아떨어진 후 다음날 학교로 갔다. 팀 메이트 올리비아에게 돌돌 말아온 AGI 포스터를 선물로 주었고, 곧바로 작업의 세계로 돌아갔다.
컨퍼런스 참여로 인해 나에게 디자이너로서의 새로운 시각이 생겼을까?
아니면 네트워크가 좀 더 넓혀졌을까?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걸 얹었다.
나도 해도 괜찮다는 것. 나처럼 유색인종이, 영어 잘 못하는 사람도, 나이가 많아도, 이곳 뉴질랜드에서, 미국에서 세계곳곳에서 좋아하는 일로 인정받고, 행복해하며 자신의 일에 가치를 두고 일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나도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것.
가장 중요한 용기를 얻어왔다.
또 한가지, 디자인너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조금 생겼다는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