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결국 정들어버렸다
3학년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며
고등학교 3학년은 9월 대학 수시 모집 전까지 생활기록부 작성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서 2학년 담임할 때는 1년간 기록을 모아두다가 2학기 학기말부터 겨울방학에 생기부를 완성했었는데, 이번에는 부랴부랴 1학기 학기말부터 여름방학 사이에 생기부를 작성했다.
올해 3학년 아이들과 3월부터 7월까지 1학기를 보내며 나는 계속해서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이전 고3 학생들과 달리 매일 학교에 등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복도에서는 물론 담임반 조종례 때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고(심지어 내가 먼저 인사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스승의 날에도 '고맙습니다' 쪽지 하나 없는 아이들. 기대하면 할수록 나만 실망하고 상처받는 것 같아 올해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매번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면 결석을 자주 해도,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도, 아이들이 애정표현을 하지 않아도 내가 상처받거나 마음 상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1년간 교사로서 혹은 담임으로서의 도리는 하지만 나도 적당히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며 다소 무심하게 아이들과 한 학기를 지냈다.
그런데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데 학생들마다 칭찬할 점이 넘친다. 글자 수가 부족해서 수식어들을 지우고, 가장 이 학생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표현만 남기고, 중복되는 내용은 압축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쳇, 예쁜 것들. 정들어 버렸네, 결국.'
막상 200명 가까운 아이들의 과목별 세부 특기사항과 담임으로서 적어주는 항목들을 채우다 보니 한 명 한 명이 꼭 잘한 점들이 있다. 집단일 때는 매일 결석생이 있다고 느꼈는데 막상 따지고 보면 대체로 한 달에 한두 번만 빠지고 대부분의 날은 등교하려고 노력해왔다. 소수의 몇 명은 수업 시간에 이어폰을 끼거나 엎드려 자거나 다른 공부를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수업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해왔다. 몇 명은 자신이 맡은 바 일인 일역을 여러 번 잔소리를 해야 간신히 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한 학기 동안 따로 언급할 필요 없이 학급에서 맡은 바 역할들을 성실하고 야무지게 해내 왔다.
그뿐인가. 고3 1학기 생기부는 고등학교 3년의 마지막 기록이기 때문에 1, 2학년 생기부에 기재된 내용의 흐름을 따라 학생의 진로와 장점을 잘 살려 마무리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그래서 대학 종합전형을 고려하고 있는 학생들 중심으로 1, 2학년 생기부 내용을 살펴봤는데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성실하고 짠할 정도로 치열한 지난 2년 동안의 학교 생활이 담겨있었다. 자신의 대입과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진로를 탐색하고, 각종 탐구를 진행한 뒤 보고서를 작성하고,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토대로 호기심을 갖고 활동해 나온 것들이 꽤 깊이 있고 진정성 있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하며 진로 고민을 했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고등학생 시절부터 치밀하게 진로를 준비해온 아이들의 땀과 정성이 생기부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내가 생기부에 적는 한 줄의 문장이 아이들의 6개월간의 시간을 표현한다. 허투루 대충 쓸 수 있을까. 다섯 명 넘는 종합전형을 준비해온 우리 반 학생들은 매일 공부와 활동을 병행하느라 새벽 두 시에나 간신히 잠든다고 말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고등학교 3년을 보내도 수시 종합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하는 학생은 많아야 한 반에 세 명 남짓이다.
과세특을 쓸 때 열심히 노력한 학생들에게 같은 표현을 중복해서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같은 대학에 지원할 경우 중복된 표현이 있으면 입학사정관이 진정성 있는 평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다 보면 '태도가 보배 같은 학생으로', '희망 진로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탐구 태도와 역량을 볼 때 장래가 기대되는 학생으로'와 같은 표현이 나도 모르게 자꾸 나온다. 정말 수업마다 한 두 명은 내가 대학 입학사정관에게 데려가서 "얘 안 뽑으면 바보!!!"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태도와 역량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들은 앞으로 저 아이가 어떻게 성장해나갈지 정말 기대되고 설렌다는 마음도 든다. 그런데 나의 이 표현력과 어휘력의 한계로 각자의 장점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못해 한탄스러울 때가 있다.
교사들이 진심과 노력을 쏟아 작성한 생기부가 종합전형을 준비하는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본인들을 가르친 선생님들이 자신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수업시간이나 복도에서 만날 때 눈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애정이 생기부를 통해 아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