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돌의 지혜 Nov 25. 2022

행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올해 일 년 동안 부모의 무거운 기대와 간섭으로 고3 수험 생활을 하며 힘들어했던 담임반 학생에게 문자가 왔다.


'선생님, 엄마가 입시 관련해서 저를 너무 힘들게 해요.'


  수능 성적이 학부모의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던 바였다. 불안도가 높은 학생이라 수능점수가 모의고사만큼 잘 안 나올 수 있으니 수시에서 안정 지원 하나쯤 했으면 좋겠다는 내 말에 명문대가 아니면 성에 안 차 지원할 수 없다고 하셨던 학부모님이다. 그러나 12년 동안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또 자신의 욕심껏 잘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 매일을 살아낸 것도,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아 제일 힘든 것도, 모의고사보다 낮게 나온 수능 성적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수능 이튿날부터 이어지는 대학 논술 시험들을 준비하고 치르느라 진이 빠지는 것도 학생 본인이다.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학생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답장하면서 문득 나의 고3 수능날 보았던 우리 엄마의 차가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고3이 되도록 한 번도 무리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나를 다그친 적 없고, 밤 10시가 지나도록 내가 공부하면 일찍 자라고 방 불을 끄고 나가던, 내가 어느 대학을 가든 상관없이 최선만 다하면 된다고 말하던 그 엄마가 수능장에서 울며 나오던 나를 보더니 싸늘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먼저 등 돌려 집으로 돌아갔던 날. 수능을 치른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엄마의 그 거리감 느껴지는 표정이 한 번씩 떠오른다.


   이제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고3 담임을 해보니 아마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성적의 모의고사를 받아오는 딸에 대한 기대감이 엄마도 모르게 잔뜩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독한 마음먹고 안간힘 쓰며 고3 수험생활을 하는 딸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시험의 결과 때문에 한 번도 눈물 보인적 없는 딸이 엉엉 울며 시험장을 나올 때 가슴이 덜컹했을 것이다. 그 치밀어 오르는 속상함을 미처 감출 수 없어 수능을 보고 나온 딸에게 따듯한 한마디 건넬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도 고3 딸의 엄마는 처음이었으니까.


  그 기억이 차가운 조각으로 마음에 남긴 했지만 엄마에 대해 그 외 별다른 원망이 남지 않았던 것은 그보다 훨씬 많은 날들 엄마가 내게 보여줬던 따듯한 신뢰와 노력들 덕분일 것이다. <엄마의 말하기 연습>이라는 책에서도 5:1로 인정의 말과 원망의 말을 섞어서 하면 원망의 말이 희석된다고 읽은 기억이 난다. 실제로 수능 당일 엄마의 차가운 모습은 숱한 날 엄마가 내게 준 따듯한 기억들로 희석이 되어 엄마와 나의 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건 아마 내가 결국은 현역으로 대학을 합격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 덕분일 수도 있지만.


  얼마 전 여섯 살 딸아이 친구 엄마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아이들이 지금 얼마나 한글을 잘 읽고 쓰는지, 영어를 얼마나 잘 말하는지, 수학 연산 문제를 어디까지 푸는지가 그날의 주제였다. 전날 딸 봄이의 담임선생님과의 정기 상담에서 봄이가 모든 면에서 우수하게 유치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사교육을 받아온 친구들과 비교해보니 학습력이나 주의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갑자기 조바심이 나고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꾸만 '내 아이들이 지금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잊어버리고 '내 아이들이 지금 얼마나 학습적으로 성취하고 있나'라는 질문만 되묻게 된다.


  고3 학부모님들 중에도, 삼십 대 내 친구들의 부모님들 중에도, 그리고 이제는 내 친구들과 나 마저도 점점 더 '진짜 나나 네가 행복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남들이 나와 내 자녀를 볼 때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누구랑 결혼했는지, 어느 동네에 살고 어떤 차를 타는지로 나와 내 자녀의 행복을 추측하니까 점점 더 '진짜로 자신이 행복한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높은 청소년 자살률과 낮은 청소년 행복도는 기이할 수준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미처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다 같이 '보이는 행복'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나 마저도 최소한 '내 집'은 있어야 하고, 내 아이들이 '평균 이상'의 성취는 보여야 최소한의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기준에 사로잡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행복한지'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질문하지 않고 '남들이 보기에도 우리가 행복해 보여야 진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이상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 잡지에 나올 만큼 유명하거나 비싼 집에 살거나 갖기 힘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그들 또한 행복해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서 행복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진심으로 스스로 혹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타인의 눈에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해 보이기를 바라는 것일까. 자꾸 멈춰 서서 질문하려 한다. 지금 여기에서 나, 내 남편, 내 아이들, 내 가족, 내 사람들 행복한가.

매거진의 이전글 베란다 프로젝트-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