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기말고사 하루 전 수업. 시험 진도를 다 마치고 시험 전날인 만큼 자습 시간을 준다. 대입에 성적이 반영되는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아이들이 많이 긴장해있다. 늘 그러하듯 시험 직전에는 더욱 의도적으로 시 한 편은 꼭 읽어준다. 마음이 낮아져있을 때 더욱 희망이 간절한 법이기에.
이 날은 김수영의 <긍지의 날>을 읽어주었다.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김수영,<긍지의 날> 중에서
와, 그런데 서른 명 가까운 학생 중 딱 두 학생이 공부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내가 낭독하는 시를 귀기울여 듣는다. 나머지 학생들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하던 공부를 이어간다.
매년 고3 국어 수업에 들어가지만 이런 매몰찬 반응은 또 처음이다. '야, 너무하지 않냐'하는 마음이 울컥 올라오다가 '그래, 얼마나 공부가 급하면 그러겠냐'는 마음으로 이해해본다. 1교시 수업 시간에 이런 반응을 겪고 나니 이후 7교시까지 있는 수업에서는 출석만 부르고 말았다.
교사가 된 이후로 매년 좋은 시나 문장, 노래로 수업을 시작했는데 점점 더 자신감이 떨어지고 위축되어 간다. 전에는 학생들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수업 도입에 귀 기울였는데, 코로나 이후 아이들 반응이 시큰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시간 읽어주던 시를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읽어주게 된다. 굳이 포기하지 않고 시를 읽는 이유는 그럼에도 교원평가나 학생들이 주는 편지나 졸업생 인사에 '선생님의 수업 도입 시가 큰 힘이 되었다'는 말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수가 아닐지라도 오늘이 가장 힘든 하루일지 모르는 그 소수를 위해 조금의 용기와 의지를 내보는 것이다.
그런데 늘 교직생활이 그러하듯 어제의 슬픔을 잠재우는 오늘의 기쁨이 있었다.
아침 출근길에 교문에서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을 마주쳤다. 교실까지 가는 동선이 겹쳐 함께 걸어가는데 말 없이 걸으려니 조금 어색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건넸다.
"**야, 너는 희망 전공이 어떻게 돼?
"저는 역사교육과 가고 싶어요."
"오, 선생님이 되고 싶었구나. 자기가 좋아하는게 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인생을 훨씬 행복하게 보내더라. 너도 그럴 거 같아."
"네...저 사실 선생님 수업 들으러 학교 와요."
"응? 내 수업?"
"네. 저 선생님 국어 수업이 너무 좋아요. 특히 가끔 읽어주시는 시 있잖아요. 선생님이 낭독하시면 얼른 받아적었다가 집에 와서 찾아보고 일기장에 다 적어요. 고3 올라오고 힘들었는데 그 시들로 버텼어요."
"진짜...? 샘은 전혀 몰랐어. 듣는 사람 없다고 생각해서 샘이 가끔 읽어주는건데... 샘한테 힘이 되네. 정말 고마워. 샘이 한 번 안아줘도 될까?"
한 번도 나를 좋아하는 내색을 따로 하거나 수업시간에 특별히 반응한 적 없는 학생이라 상상치도 못했던 말이었다. 길가다가 갑자기 사랑 고백 받은 기분! 오늘 아침 출근길만해도 교사로서 내 강점과 진로는 어디에 있는걸까 고민했는데 정말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다.
그리고 학생의 말에서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현재 나의 교사로서 강점은 '문학, 글쓰기, 수업, 동기부여, 위로와 치유'에 있다. 내 말과 글에 분명 감동을 주는 힘이 있다.
내가 충분히 좋은 교사임을 믿고 자신있게 나다운 수업을 해나간다. 용기를 내서 학생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이 모든 넘치는 이야기들을 책으로 담아낸다. 힘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