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나의 아기

김수영, <책>

by 옥돌의 지혜


첫째 봄이를 가졌을 때 태교를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했었다. 많이들 좋은 음악을 감상한다는데, 당시 나는 힙합 음악에 빠져 '쇼미 더 머니' 프로그램을 애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신나는 음악은 태아에게 그리 좋지 않다고들 했다. 그래도 왠지 내가 억지로 좋아하지 않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을 내 뱃속의 아기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내가 행복을 느껴야 아기도 함께 행복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좋아하는 시 필사였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필사 노트에 옮겨 적은 시는 김수영의 '책'이었다.



책을 한 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 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여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김수영, <책>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시 속의 작은 책에 적혀있는 아름다운 구절들을 다 읽은 것마냥 설렜다. '바람, 숲속, 현사시나무, 꽃눈, 봄눈, 구슬, 책'과 같은 소리내어 읽으면 더 소중한 단어들이 시에 가득했다. 시를 옮겨 적으며 뱃속의 우리 아기도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누리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내심 부족으로 시 필사는 오래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의 첫 태교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오늘 둘째 가을이와 집에서 뒹굴고 있는데, 갑자기 이 시가 다시 떠올랐다. 왜냐하면 내 눈 앞에 있는 가을이가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했기 때문이다. '어, 나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시를 알았던 것 같은데...' 하면서 시 필사 노트를 다시 뒤져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 시를 읽었을 때 참 우리 아들 가을이 같은 시란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는 침대에 눕혀놓으면 자기 애착 이불을 찾아 기어가서 꼬옥 끌어안고는 뒤로 벌러덩 눕는다. 그리고 마구 얼굴을 비비면서 까르르 웃는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정말 댕댕이 같다. 다가가서 가을이를 품에 안으면 몸은 말랑말랑한데 포근한 냄새가 난다. 계속해서 안고 있고 싶다. 가을이도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 자기도 따라서 웃는다. 자기 예뻐하는 줄 다 알고서. 가을이의 희고 보드라운 살결은 꽃잎 같다. 옹알거리는 목소리는 새소리 같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며 바라보는 저 눈빛은 별빛 같다. 다른 일로 기분이 좀 상했다가도 나를 빤히 바라보는 가을이 얼굴을 보면 금세 배시시 웃음이 난다. 매일 언제 크려나 싶다가도 이렇게 예쁜데 빨리 커버릴까 봐 겁난다. 그래서 첫째 봄이처럼 어느새 '엄마 미워!'와 같은 말들로 나를 밀어내는 날이 생기면 어떡하나 벌써 걱정이 앞선다.


나는 시를 통해 사랑을 배운다. 내 첫사랑도, 첫 이별도, 부부간의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시가 있어 더 선명하게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다. 삶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쉽지 않지만, 매일 아침 먼저 일어나 나를 흔들어 깨우는 나의 두 아이를 보며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두 아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그래도 삶은 아름다운 것이지 새삼 깨닫는다. 시가 있어 어찌나 다행인지, 그리고 매일 새로운 아름다운 시들이 쓰인다는 것은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른다. 오래오래 시에 기대어 위로받고 감탄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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