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교사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휴직 기간을 빼면 3년의 경력밖에 없는 병아리 교사이지만 한해 한해가 지날수록 교직 생활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기간제 교사로 첫해를 보낼 때까지만 해도 나를 교사로 만난 학생들은 행운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담임을 맡고, 여러 힘든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만나고, 과중된 업무에 헉헉대며, 나보다 훨씬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능력이 뛰어난 동료 교사들을 보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내가 정년까지 교사로 버틸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도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에서 많이 웃는다. 힘도 들고 화도 나지만 여전히 학교에서 많이 즐겁다. 아직은 '선생님이라 참 다행이야'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교직 경험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 하나를 꼽을 만큼 대단한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떠올리면 흐뭇해지는 순간들은 갖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수업 전 5분 도입 시간과 문학 시간이다. 5분 도입 시간은 한 학기 동안은 내가 주도하고 다음 한 학기 동안은 학생들이 주도한다. 그 시간에 우리는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시나 문학의 한 구절, 또는 노래 가사를 공유한다. 처음 그 시간을 만든 이유는 나만 이렇게 아름다운 말들을 아는 것이 아깝고, 국어 시간에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에서 처음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 아이들에게 아주 잠깐이나마 숨 고를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내 우려와 기대를 뛰어넘어 이 시간을 사랑해준다. 이 5분 사이에 아이들의 표정이 변한다. 내가 감동받은 것으로 아이들에게 같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다. 2학기 때는 수업 5분 도입을 자진한 학생들의 발표로 진행하는데, 의외로 아이들은 서로 발표하려고 한다. 생각보다 정성들여 준비해온다.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자기가 받은 감동을 친구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소박한 바람. 그 때는 듣는 아이들보다 발표하는 아이의 설렘이 느껴져서 더 흐뭇하다. 문학수업 시간에는 가능하면 지식 전달보다 많이 느끼고 생각해보도록 질문을 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비슷한 경험에 대해 얘기해보고 그 때 느낀 감정들을 나누어보려고 하는데 이게 무척 재밌다. 사실, 같은 지문을 갖고 수업을 여섯 반 들어가면 반복되는 내용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지치게 되는데 문학 수업은 각 반마다 애들의 반응이 다 달라서 지겨움이 덜하다. 특히 가끔가다 자기 얘기를 정말 찰지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다 다 같이 빵 터져서 웃다보면 '일하면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하는 생각도 든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정말 잘 맞는 반 아이들과 수업하다가 너무 웃어서 눈물을 흘리는 경험을 하는데 그럴 때면 '선생님이라 참 다행이야'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아이들이 내 말 한마디에 힘을 얻을 때 교사인 게 새삼 감사하다. 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말'이다. 내가 여고생일 때 선생님들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크고 작은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나 또한 조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요즘처럼 자존심 강한 학생들과의 관계를 좌우하고 민원의 대상이 되기 가장 쉬운 부분이 교사의 말이기 때문에 '말조심'은 교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 2위다.(1위는 단연 출제 스트레스...하) 평소 학생들 앞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굉장히 조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또한 내뱉은 이후 마음에 걸리는 말은 다시 곱씹어보거나 주위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명백한 실수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은 최대한 빨리 학생들 앞에서 다시 정정하거나 사과하려고 노력한다. 스승의 날에도 혹시라도 내 말로 상처받은 학생이 있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려고 한다. 평소 말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학생들에게 말할 때는 예민한 감각을 지키려고 애쓰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몹시 피로하다. 그럼에도 내가 이토록 말 한마디에 신경 쓰려고 하는 것은 내가 만나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내 말의 진심과 노력을 다 읽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써주는 편지나 교원평가를 보면, '선생님이 그때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게 저를 배려하셔서 하신 거 알아요. 정말 감사했어요.'라거나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가 정말 큰 힘이 돼서 일 년을 버틸 수 있었어요.'라는 인사가 많았다. 거꾸로 나에 대해 서운함을 표현하는 내용도 결국은 말 한마디에 관한 것이었다. 살면 살수록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고 영향력이 있는 존재가 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선생님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학생을 만나고 말 한마디로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힘과 희망을 줄 수 있다. 그것을 매년 확인한다. 나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는 경험은 아직 못했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의 한 시간, 누군가의 하루가 변하는 경험은 자주 하고 있다. 그럴 때 나는 '선생님이라 참 다행이야'라고 느낀다. 언젠가 이 영향력이 너무 부담되고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더 깊어지는 한 사람이 되어서 아이들에게 더 괜찮은 말을 건네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나 스스로 내가 '선생님이라 참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하지만, 언젠가 학생들에게 내가 '선생님이라 참 다행이다'는 말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