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대학 엠티 따위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 종종 인생 그래프를 그린 경험이 있다. 그것을 그리다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낮아져 있던 때를 떠올리게 된다. 살아가는 날 가운데 가장 추웠던 그 시절. 삶의 여러 계절 가운데 한겨울로 기억되는 그때. 나에게는 그 시기가 대학교 3학년 미국으로 떠난 교환학생 한 학기였다. 교환학생을 떠나기 직전 한국에서 나의 생활은 완벽하다고 느꼈다. 바라던 대로 국문학과 교육학을 이중 전공하며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고 좋은 성적도 내고 있었다. 인간관계에서도 안정감을 느끼며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과외에서도 인정을 받아서 두 배 이상의 과외비를 받았다. 게다가 나름 열심히 준비한 미국 교환학생도 바라던 학교에 무사히 합격했다. 내 삶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고 나 자신에 대한 교만한 마음도 들었다. 미국 교환학생을 가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오면 부모님께 유학을 보내달라고 말씀드릴 작정이었다. 새로운 생활이 낯설고 두렵기도 했지만,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훨씬 컸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면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에서 지냈던 것처럼 실패의 기억이 아닌 꼭 성공의 기억을 갖고 돌아오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미국 중부의 백인들이 가장 많다는 지역을 골랐다. 짧은 기간인 만큼 확실하게 미국 문화를 경험하고 영어 실력도 늘리고 무엇보다 미국 대학 교육을 제대로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중학교 때 경험한 미국 서부와 달리 대학생 때 경험한 미국 중부는 훨씬 더 동양인에게 배타적이었다. 게다가 사범대의 정규 수업을 듣는 교환학생은 나 한 사람이었다. 그 지역에서만 나고 자라 교사를 준비하는 미국인 학생들 중에는 아시아인과 처음 말을 섞는다고 말한 학생도 있었다. 반인종차별 클럽 부회장인 백인 룸메이트는 매일 내게 트집을 잡았다. 수업 시간에 옆에 있는 사람과 토론을 하라고 하면 내 옆에 있는 학생들은 책상을 들고 뒤로 자리를 이동했다. 길을 결어가다가 혹은 상점에 들렀다가 각종 모욕하는 말들로 인종차별을 당했다. 기숙사 여자화장실에서 매달 성폭행 사건이 터졌다. 캠퍼스에서 총기 사고가 났다.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견디다 한 달만에 몸무게가 십 키로 넘게 늘어 가져온 옷들을 입을 수 없었다. 백인 룸메이트와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룸메이트를 변경해 드디어 한국인과 살게 되었다. 그 한국인은 밤마다 남자 친구를 방에 불러들였다. 자다 깨 옆 침대에서 그들을 발견했을 때의 경악스러움이란. 두 아시안이 사는 우리 방 앞에 쓰레기봉투를 터뜨려놓고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 모든 인종차별과 룸메이트의 몰상식한 행동들은 모두 무식하고 저급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나에게 상처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일 때뿐'이라는 말을 매일 마음에 되새겼다.
어떻게든 나는 이곳에서 목표한 성적을 얻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매일 수업만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했다. 새벽까지 공부한 날도 많았다. 한국에 돌아갈까 고민한 순간도 있지만 한 번도 중도에 포기해본 적 없는 내 삶에서 저런 사람들 때문에 포기의 경험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렵게 교환학생을 보내준 부모님을 뵐 낯이 없었다. 어떻게든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매주 한인교회도 가고, 미국인 교회도 가고, 학교 캠퍼스 기독교 모임도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나를 이렇게까지 내버려 둘 수 있어'라는 배신감을 느꼈다. 교환학생을 떠나기 직전, 내가 따르던 교수님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힘들면 무조건 나가서 걸으라고 했다. 그러면 마음을 지킬 수 있다고. 그런데 내가 있는 지역은 영하 40도의 겨울이 긴 곳이었다. 잠깐 기숙사 앞에서 콜라 하나 사 오는 사이 그 콜라가 얼어붙는 곳이었다. 신앙에도 의지할 수 없고, 산책조차 할 수 없고, 어떻게 이 절망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던 그때, 한국에서 친한 친구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다.
편지는 두 장이었는데, 한 장에는 내 안부를 걱정하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다른 한 장에는 시 한 편이 쓰여있었다. 교환학생을 오고 마음이 침잠하면서부터 친구들에게도 메일이나 SNS로 연락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잘 지내고 있지 않은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잘 지낸다는 말 뿐이었으므로. 섬세하고 나를 잘 아는 친구는 그래서 연락이 안 되는 나를 더 걱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친구가 보내준 이 시를 읽고 나는 창밖에 눈 내리는 작은 기숙사 골방에서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글을 쓰며 시를 다시 읽는 이 순간에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처음 맞아보는 이 매서운 추위와 시련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나와 같은 화자. 마음의 무거운 슬픔에 깔려 죽을 것만 같을 때 크고 높은 것의 뜻을 생각하는 화자. 그리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마음을 동여매는 화자. 꼭 내 마음과 같은 이 시인의 화자에게 나는 그 어떤 위로보다도 뜨거운 위로를 받았다. 이후에도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울기도 하고 의연해지기도 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백석의 시들을 읽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백석의 팬이 되어 그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결국 정해진 교환학생 기간을 모두 마쳤고, 바라던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돌아와 트라우마 관련 심리상담을 교환학생 기간만큼 받고서 마음이 괜찮아졌다.
오직 내게 절망과 좌절만을 겪게 한 것 같은 이 시간은 이후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교환학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간은 도서관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 미국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매주 한국어를 가르치던 시간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진로를 고민하고 미국 유학 대신 교사의 길을 준비하게 되었다. 또한 평생 모태신앙인으로 신앙생활을 잘해오고 있다 자부했던 생각이 깨어져 한국에 돌아와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가치관에 큰 변화가 생겼다. 나는 교환학생 동안 미국에서도 유명하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살았고, 한도 없는 엄마 카드로 생활했지만, 아주 불행했다. 그래서 행복은 외적 환경과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마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환학생을 다녀와 심리상담을 받고,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시간이 흘러 사람들에게 나의 이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때 내게 좋은 일들도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캠퍼스 기독교 모임 백인 친구들은 진심으로 나를 위하고 배려해주며 그들의 공간에 초대해 마음을 나눠주었다. 그때 함께 힘듦을 나누었던 몇몇 한인 친구들과는 여전히 연락하며 지내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곳에서 보고 느낀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지금도 내 마음에 큰 보석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학교에서 만난 교육학 교수님들의 가르침은 교사가 된 지금도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다.
국어 수업에서 교과서를 펴기 전에 시나 좋은 구절 하나를 꼭 학생들에게 읽어주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오늘 만나는 이 아이들 가운데 이 시 한 편이 살아가는 힘을 줄 수 있으므로. 실제로 뒤늦게 찾아와 내가 어느 날 읽어준 시 한 편으로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해주는 학생들이 꽤 있다. 어쩌면, 내 삶의 한 겨울에 만났던 백석의 시 한 편은 내 학생들에게 그런 순간을 선물하는 교사가 되게 하기 위한 신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