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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지혜 Dec 14. 2021

교사인 나도 재테크 공부를 시작했다(1)

왜 나는 그동안 돈에 무지했는가

  최근 나의 일상은 크게 일(교직), 가정(육아와 살림), 신앙생활 그리고 재테크 공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내 삶에서 새롭게 추가된 영역은 '재테크 공부'이다. 저축만이 미덕인 줄 알던 나는 어떻게 재테크 공부를 하게 되었나. 


  우선 나는 재테크에 큰 관심 없이 성실하게 근로소득으로 생활해온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우리 아빠는 매일같이 야근하며 성실함의 표본인 삶을 사셨다. 그 흔한 청약통장도 최근에 나의 권유로 만드셨을 정도로 우리 부모님은 대체로 근로소득만으로 평생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하셨다. 부모님이 평생 정직하고 근면하게 일하셨고 본인들의 노후 대비까지 하신 것은 너무나 존경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항상 '우리 집의 형편이 빠듯하고 어렵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사셨다. 핑계를 대자면 부모님부터 재테크에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하셨기에 특별히 자녀인 내가 부모님에게 받은 재테크 교육이라는 것은 없었다. 남들도 다 우리 가족처럼 이렇게 적당히 빚을 갚으며 저축만 하고 사는 줄 알았다.


  또 나의 돈에 대한 오랜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십 대, 이십 대 때 만난 부유한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강남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이십 대에 쉬지 않고 과외를 하면서 많은 부자들과 그 자녀들을 만나보았다. 부모님이 연예인, 사업가, 전문직 등등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대체로 그 가정들도 알고 보면 저들만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며 각자의 고민이 깊었다. 그런 속사정을 알게 될 때마다 자기 위안이었을지 몰라도 대단한 경제적 부유함을 누리는 것보다 화목한 우리 가족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행복이 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관계의 안정감에 있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물론 지금도 내게는 관계의 행복이 돈에서 오는 만족감보다 우선이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착각한 것이 있다. 많은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부족한 돈이 행복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날, 나는 화장실에 가서 울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는데 결국은 벌이가 적은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이 속상했다. 가장 속상한 점은 앞으로 내 능력으로 부모님께 그럴듯한 물질적 효도는 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복해야 부모님도 행복하다는 신념을 갖고 그 길을 선택했다. 부모님은 나의 논술과 화술로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셨던 터라 아쉬운 마음은 있으셨지만 내 꿈을 존중해주셨다. 그러나 대학원 과정의 학비는 모두 내가 부담해야 했다. 


  대학생 때는 학비 외에 생활비를 버느라 많을 때는 주 5일 과외에 주말에는 교육봉사를 했다. 대학원생 때는 거기에 학자금 대출을 갚아가며 임용 공부 비용까지 감당해야 했다. 지치는 마음이 오랫동안 들었다. 딱 한 학기만 알바를 쉬거나 휴학을 하고 싶었다. 그게 한처럼 맺혀서 내 자식은 꼭 한 학기는 휴학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지낼 수 있게 지원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어쨌든 그때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아주 큰 자산이 된 것은 사실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늘 양면의 동전과 같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을 할 때 신혼초에 둘이 모은 돈만 가지고 시작을 했다. 남편과 나는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 매우 희망적이었다. 양가 부모님은 노후대비가 되어있었고, 우리 둘도 충분한 교육을 받았으며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둘이 성실하게 돈을 벌면 늦지 않게 적당히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 그늘을 벗어난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우리 둘의 자금으로 간신히 12평 투룸 빌라를 마련했다. 거실이 좁아 양가 부모님이 집들이를 오셨다가 편히 앉을 수 없어 금방 돌아가셨다. 저녁이면 술에 취한 사람들의 고성이 들려 남편이 늦는 날이면 무서움에 떨었다. 첫째를 임신하고 나의 닦달에 못 이긴 남편이 결국 더 넓지만 오래된 아파트 전세로 이사를 결정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이었다. 아기를 유모차 태워 나오면 내려갈 때는 유모차를 놓칠까 겁이 나고 올라올 때는 내 힘으로 유모차 미는 게 버거운 경사였다. 그러다 보니 육아휴직 내내 집에만 머물게 되었다. 한 친구는 내게 왜 남들처럼 동네 마실도 다니지 않고 매일 우울해하며 집에만 있냐고 타박했다. 


  그때 처음 재테크에 반짝 관심을 가져보았다. 평소 살아가며 문제를 만날 때마다 책에서 답을 찾는 나인지라 몇몇 유명한 부동산, 청약, 재테크 관련 책들을 읽어보았다. 열의는 있었으나 신생아를 키우며 공부를 이어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리고 부동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우울해졌다. 내 친구들은 그냥 부모님이 물려준 돈으로 편하게 사는데 왜 나는 평생을 열심히 살고도 이렇게 아등바등 애써야 하지. 아,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계층 이동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의 대물림의 골은 더 깊어지는 것이구나. 괜히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마음이 힘들어서 부동산 공부를 그만두었다. 일단은 평생 내 삶을 책임지신 하나님을 신뢰하자 생각하며 육아 우울감에서 좀 벗어나고 내 마음이 건강해지면 다시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아예 그 문제를 외면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즈음 나보다 훨씬 긍정적이고 단단한 내 남편은 우울하고 반복되는 나의 하소연을 들으며 말했다. "당신이 살고 싶은 곳이 어디야? 내가 거기 살게 해 줄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듬해 남편은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지역의 청약 임대에 당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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