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학기 초에 첫 수업 날이면 내가 하는 것이 있다. 오리엔테이션을 가장한 나의 학창 시절 성적 올린 썰(이야기)을 푸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기 전 학생들이 나를 보는 눈빛은 호기심과 경계심 사이에 있었다면 이야기를 들은 후 학생들의 눈빛은 동경과 신뢰로 변한다. 이제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십여 년이 지났기에 점점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도 하고, 이야기를 더 과장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나중에 내가 교육자가 되었을 때 내가 해낸 이야기를 내가 만난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너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겠다'였기 때문에 쑥스러워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자기 자랑을 한다.
나는 고1까지 반에서 10등 안에 들지 못하고 전교에서 100등 안에 들지 못하는 아이였다. 좋은 학군의 학교이기는 했으나 일반고였으니 분명 중위권 성적이었다. 나는 고1 때까지도 항상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다만 잠이 많아서 수업 시간에 자주 졸았고, 독서실에서 15분 이상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 힘들었다. 그래도 자존감은 높아서 언젠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당시 내게 남다른 가능성이 있었다면 어릴 적부터 독서를 즐겼던 덕분에 국어만큼은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잘했다는 점이다. 이런 내가 고2에 올라가며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마음먹은 데에는 여러 계기가 있었다.
우선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절친이었던 친구와 갈등이 생겼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공부를 잘하는 친구와 비교를 당하며 억울한 일들을 겪었다. 고1 때는 반에서 10등 안에 들지 못하는 내가 학급 임원이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담임선생님께 들었다. 또한 학교에서 전교 100등 이내의 성적에 든 아이들 명단을 복도에 붙였는데 항상 내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전교 40등 안에 드는 학생들만 자습실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나는 학교에 남아 자습을 하고 싶어도 자습실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 불합리한 차별들 속에서 나는 어렴풋한 불안감을 느꼈다. 어쩌면 나는 계속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실력 없는 사람으로, 앞으로도 이렇게 가볍게 무시당하며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어중간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나답게 우뚝 서보고 죽고 싶었다. (과격한 표현이지만 당시 심정은 정말 그랬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우선 교회 수련회에 가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 진짜 공부 잘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저를 쓰려고 할 때 실력 없어서 쓰이지 못하는 거 싫어요. 저 공부 좀 잘하게 해 주세요. 공부하는 마음도 주시고, 좋은 선생님이랑 친구들도 붙여주시고, 공부할 수 있는 지혜도 주세요. 무엇보다 꿈을 주세요. 꿈이 있어야 공부를 한대요.' 수련회 며칠간 그렇게 기도했을 때 잠깐 잠이 들어 꿈을 꾼 건지 정말 환상을 보여주신 건지 모르지만, 할머니가 된 내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수련회에 다녀온 이후 집에 틀어져 있는 티브이에서 우연히 청소년 범죄 뉴스를 보았다. 순간 가슴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팠다. 저 화면 속 아이들이 누군가의 절실한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싶었다. 교육자가 되어 아이들의 마음을 안아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으로 나는 공부법에 관한 책이란 책은 다 읽으려고 노력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공부법'이란 키워드가 들어갔으면 모조리 읽었던 것 같다. 그중 일본인 대학교수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이 인상 깊었다. 사십 여 권의 공부법 관련 책들을 읽으며 전반적인 공부를 대하는 태도부터 자세한 공부 기법까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머리로 이해한 것들이 실천에 옮겨지지가 않았다. 여전히 책상에 앉아 15분 이상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내가 읽은 공부법 책들에서는 왜 공부하는지 스스로 동기가 있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봉사활동도 가보고 동기부여로 검색해서 나오는 모든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당시 마침 교내 편집부 동아리 활동을 했기에 기사를 핑계 삼아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연락해 인터뷰 요청을 했다. 전 장관부터 고려대 교육봉사 동아리 회장까지 만났다. 인맥이 없으니 그냥 고려대에 전화해서 선배를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연결을 해줬다. 그날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고려대 봉사동아리 운화회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고등학생인 나를 환대해주었고 하루 종일 데리고 다녔다. 본인들의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교 구경도 시켜주고 치킨까지 사 먹여 집에 보냈다. '내가 가진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은 전혀 자랑할 거리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던 선배들과의 만남에 가슴이 뛰었다. 그날 나는 집에 가지 않고 바로 독서실로 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고려대 운화회'라고 크게 써 붙여놓았다. 내가 2년간 열심히 공부하면 이 선배들과 같은 동아리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다음날부터 무조건 책상에서 4시간씩 앉아있기로 했다. 처음으로 오후 6시에서 10시까지 한자리에 앉아있었다. 물론 공부에 하나도 집중이 되지 않고 앉아있는 것이 너무 괴로웠지만 인생 처음으로 의자에 4시간을 앉았다는 것이 무척 뿌듯했다. 앞으로 이 4시간 동안 집중하는 시간을 10분씩 늘려나가기로 했다. 그건 아주 좋은 전략이었다.
내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는지 고2 때 나는 특별한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만나는 인연들이다. 담임 선생님은 반장인 나를 아껴주시며 전적으로 믿어주셨다. 내게 '너는 네 뒤에 날개가 있는데 너만 모른다. 너는 정말 잘 될 거다'라며 격려해주셨다. 우리 반 1, 2등을 다투던 두 친구는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볼 때마다 나를 기특해하며 도와줬다. 본인들의 공부방법을 다 알려주다 못해 나중에는 학원부터 독서실까지 똑같이 데리고 다니며(?) 공부를 도와줬다. 이후 우리 셋 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고, 현재 그 두 친구는 같은 직장을 다니고 있다.
고2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내 공부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전의 열심은 지금의 열심과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열심히 노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마음먹고 열심히 해보니 그 전의 나는 별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4시간씩 자리에 앉아 10분씩 공부하는 시간을 늘리는 연습을 하면서 고2 1학기 중간고사 때 전교 80등을 했다. 처음으로 전교 100등 안에 들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고 신기했다.
나는 스터디플래너를 맹신했다. 스터디플래너 쓰기는 내가 읽은 모든 공부법 저자들이 추천했고, 당시 메가스터디 손주은 선생님이 매년 스터디플래너를 무료로 나눠주며 격려하는 방법이었다. 2년간의 내 계획이 틀림없고, 내가 이 계획을 그대로 지켜만 나간다면 반드시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흔들리거나 돌아갈 여유가 없었다. 당시 박지성의 자서전을 읽었는데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나보다 잘하는 누군가가 쉴 때 나는 쉬지 않고 계속 훈련했기에 언젠가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 와닿았다. 고1 때까지 놀만큼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주가 멀다 하고 노래방과 한강을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놀았다. 이제 2년 정도는 놀지 않아도 아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마다 만나서 놀던 친구 무리에게 2년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공부를 달렸다. 몸살이 나서 전략적으로 하루 푹 자는 날 외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티브이나 영화를 보며 하루를 날린 적은 없다. 스트레스 관리도 전략이라고 생각해서 일주일에 드라마 한 편은 독서실에서 돌아와 야식을 먹으며 보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 하나는 하고 있다 생각하니 더욱 다른 유혹이 들지 않았다.
성적이 오르니 공부가 재밌었다. 이대로 계속 오른다면 꿈이 꿈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복과 필통, 가방에 고려대 배지와 스티커로 도배를 하고 다녔다. 반에서 10등 안에도 못 드는 애가 고대 가겠다고 갑자기 이러니 친구들도 얄미워하기보다는 귀여워했다. '아구 우리 옥돌, 열심히 해서 꼭 고대가거라~'하며 응원해주었다. 오히려 가끔 선생님들이 상처를 주었다. "너 성적 많이 올랐다며? 그래도 내가 너 서울 중위권 이상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수업시간에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신 분도 계셨다. 그땐 참 당돌했던 게 "네, 선생님. 말씀대로 되게 해 드릴게요. 기다리세요."라며 웃으며 꼬박꼬박 말대꾸를 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가끔 당돌한 내 학생들에게 할 말이 없다.
고3 때는 반 친구들과 기도모임을 만들었다. 매주 만나서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고 같이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내가 대학에 합격한 날에도 이 친구들과 다 같이 교회에 가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함께 기도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끝까지 신앙 안에서 마음을 지키며 공부해나갈 수 있었다.
부모님은 자녀 교육에 관심은 많으셨지만 나를 밀어주시기만 하지 끌고 가시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지방대를 가도 상관없지만 재수는 지원해줄 수 없다고 하셨다. 밤 10시가 되면 잠을 자라며 불을 끄셨다. 뭔가 스스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과 독립심이 생겼다. 혼자 다른 학교의 학부모 입시설명회에 교복을 입고 찾아갔다. 고2 때 공부를 시작한 만큼 확실한 입시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고1 내신을 날렸으니 남은 2년간 내신을 수습하는 동시에 수능과 논술을 아주 뛰어나게 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혼자 학원비를 계산하고 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엄마에게 학원비를 부탁해서 다녔다. 나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대한 학원을 줄이고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늘려야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공부한 것들 중 모르는 것만 질문할 수 있는 주 1회 대학생 과외만 하고 최대한 인강으로 돌렸다. 학원을 다니게 되더라도 가급적 공부법만 빨리 익히고 3개월 내로 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2년 넘게 주 1회 논술학원은 꼭 다니려고 했다. 남들이 하는 대로 학원만 다녀서는 논술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기 힘들 것 같아 매일 아침 학교에 도착하면 신문 논설문을 읽고 요약하는 연습을 했다. 수능 전날에도 신문을 요약하다가 쓸데없는 공부를 한다며 선생님께 핀잔을 들은 기억이 난다.
내 전략은 고2 때 국어, 영어, 사탐을 거의 다 잡고 고3 때는 나머지 과목은 유지하면서 수학에 올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고3 때는 총 5시간 정도의 공부 시간 중에 3시간 가까이를 수학에만 투자했다. 수학이 제일 자신 없는 과목이라 그랬다. 성적은 고2 때부터 전교 80등에서 40등, 20등 점점 오르더니 고3 9월 모의고사 때 전과목 1등급으로 전교 1등을 했다. 거의 모든 과목이 만점이었는데 특히 수학을 처음으로 100점을 맞았다. 엄마는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시더니 우리 집 가보라며 이제 대학에 못 가도 이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처음 생각보다 성적이 너무 오르니 서울대를 생각하고 국사 과목을 준비하지 않은 게 내심 후회가 되기까지 했다. 이게 실수였다. 9월과 10월 모의고사 성적이 너무 잘 나오자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전에는 온 힘을 다해 공부했다면 이제 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심지어 수능을 기다렸다. 그 결과 수능날 수학을 망쳤다. 수능시험장을 나오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의고사만큼 수능을 못 봤다고 좌절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당장 일주일 내로 대학 논술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논술만큼은 수능처럼 까불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매달려보자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시험장에 갔다. 붙을 것 같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최소한 내 실력을 다 보이고 왔다는 생각에 미련은 남지 않았다. 논술 점수가 최상위권인 학생에 한해서 수능 과목 3개가 1등급이면 내신을 적게 보는 전형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 나에게도 대학 합격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처음으로 내게 '나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갖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수없이 많은 도전들을 할 때에 이 경험을 기반으로 나는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었다.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 작아질 때 나는 우리 고등학교에서 십 년에 한 번 나온다는 전교 등수 100등을 올린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도전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내 학생들에게 실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대학을 가든 안 가든 삶에서 나의 최선으로 우뚝 서는 경험을 꼭 했으면 한다고 말한다. 수없이 개인을 의심하고 뒤흔드는 험한 세상에서 '아니,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고등학생 때 노력하는 이 모든 시간이 단순히 대학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결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때때로 내가 대학에 합격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면 열 명 중 하나는 '그건 선생님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잖아요'하고 삐딱하게 바라본다. 나 역시 나의 경험담이 '나는 할 수 있는데 너는 왜 못해'라는 폭력적인 메시지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히 전달하려고 한다. 하지만 '쟤도 하는데 나라고 왜 못해?'의 마음으로 우리 해보자고 한다.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이후 대학에 가서 교사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강남의 상위권 아이들을 과외로 가르치고, 저소득층 학생들을 교육봉사로 가르치면서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게 학생들을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국문학과 교육학을 이중 전공하면서 특히 '교육심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기부여'로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 미국 사범대로 교환학생을 갔다. 공부는 흥미로웠지만 그 경험을 계기로 교사가 되기로 진로를 정했다.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국어교육 석사과정을 배우면서 '공부법, 동기부여'를 전공으로 하는 교수님의 조교로 교수님의 연구를 도울 수 있었다. 수많은 '공부법, 동기부여'와 관련된 논문과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내 학생들에게 다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교사가 된 이후,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일 년 내내 잔소리할 거야. 어떻게 하면 공부 더 잘할 수 있는지 생각날 때마다 말할 거야. 너희는 할 수 있다고 계속 말할 거야. 공부와 대학이 정답이고 최고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한 번쯤 자기의 최선과 성실을 다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야. 듣기 불편한 친구도 있겠지만, 지나고 나니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친구들이 더 많으니까 좋은 마음으로 들어줘.'
벌써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된 지 8년 차이다. 매년 아이들에게 반복하는 공부이야기가 꽤 쌓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수업에서 만나는 학생들 외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내 공부 꿀팁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글로 한 번 정리하고 가려고 한다. 내 글이 내 말만큼 힘이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