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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one Jul 19. 2022

4 | 해석 논쟁

Ludwig Wittgenstein

『논고』는 해석이 난해한 책으로 유명하다. 책이 출판되고 수십년이 흐르면서 산전수전을 겪었고 풍파를 맞이 해왔다. 특정 섹션을 구별짓는 주석상 문제를 뒤로하고서도, 약간의 의견 차이가 존재했기 떄문이다. (세계와 실재의 구별, 모사와 표상 간의 차이, 비트겐슈타인과 프레게/러셀 사이의 연결 또는 실존주의가 비트겐슈타인에 미친 영향 등과 같다.) 이것들은 실재론, 무의미의 개념, 윤리적 문제로서의 논고 해석, ‘논고 그 자체를 해석을 하는 행위로서의 역할‘로 환원된다.


논고가 실재주의를 주창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존재한다. 즉, 개인의 입장과 무관하게 사물, 사태, 사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언어적 전회Linguistic Perspective를 통해 성립되는 실재주의는 모든 해석가에 의해 공유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적 관점은 논고를 전개시키는 것처럼, 마치 텍스트 전반에 스며드는 것처럼 보여지는 ‘기본적인 실재주의’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실재주의는 본질적인 명제의 양극성bi-polarity으로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림 이론에 대한 올바른 미독(味讀)은 기호로 인하여 표상되는 객체를 상정한다. 이러한 해독과는 다르게 언어학적 (지향된) 해석들은 상징주의에 관한 개념적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현실은 명제와 비교된다.”(TLP 4.05)고 할 때, 현실의 형상을 결정하는 것은 명제의 형태가 된다. (역은 아니다.) 어쨌든 논고에서의 실재주의 논쟁(또는 Anti-Realism)은 언어의 한계에 관한 물음과 언어 너머에 있는 존재에 관한 여부에 대해 더욱 상세한 물음을 제기하여야한다. 그러함에 따라, 논고 해석가들은 바로 형이상학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동할 것이다.  


‘무의미Nonsense‘란 20세기의 지난 수십년 동안에 비트겐슈타인 학자들간 해석 담론의 충돌 지점이었다. 언어의 경계 너머에는 ’무의미‘하며,―명제로는 어떠한 것도 뜻 조차 형성시킬 수 없는―전통적 형이싱학을 ’무의미‘의 영역으로 ’금지‘시켰다. 비트겐슈타인이 명백히 (말하여 진다기 보다는) 단지 보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미의 영역은 ‘신비스러운 것’으로서 ‘무의미의 영역/존재’에 관한 물음을 발생시킨다. 반면 논고에 관한 전통적인 해석은 불친절하고 난해한 글, 말하여질 수 없는 것의 존재, 언어로 만들 수 없는 것, 무의미한 것 정도로 다양화되었고 이를 받아들였다. 최근의 해석은 무의미를 더욱 자세하게 들여다 보는 경향이다.


이것은 또한 TLP 6.54의 구절로 수반된다. ―유명한 비유로서― “논고 텍스트 자체를 벗어나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스스로 내던져야한다.“는 것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과 오직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 사이의 구별을 가리킨다. 이 입장에서 형언할 수 없는 진실(예컨대 형이상학, 도덕, 미학 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표를 할 수 있도록 해내겠다는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반되는 논의는 반드시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지, 이것이 의미할 수 있는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다루어야만 한다.


이 논의는 논고의 윤리적 해석이라 불리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윤리적 해석이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세계 시스템의 구성과 서문에 있는 이 구성에 관하여 작성된 의견들 사이의 몇 가지 불일치에 근거한다. 출판 전 출판 발행자인 Ludwig von Ficker에게 보냈던 편지와 그것과 가까운 텍스트 안에 있는 서문들이다. 이 모든 상황과 공간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철학적 문제의 최종 해결책”은 이 책의 외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내적인 내용까지도 포함시키는, 설교의 최종적 표현이다.


중요한 것은 윤리적 입장이란 것이 언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의 작업은 2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여기에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쓰지 않은 부분이다. 그리고 엄밀하게 중요한 부분은 후자다. 도덕적인 것에 관한 것은 나의 내면과 능력으로부터 한계를 가져온다. 나는 침묵을 지키면서 동시에 이 책에 모든 문제들을 다뤘고 모든 것을 넣기 위해 시도했다. 지금은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서문과 결론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서문에는 무의미를 논의하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ProtoTractatus, p.16) 분명히, 저자가 쓴 텍스트에 관하여 모순적인 분위기다. 이는 해석적인 수수께끼를 불러 일으킨다.  


비트겐슈타인 해석가들에 의해 논의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이것은 후기와 전기 사상 사이에 연속성과 관련이 있다. ‘표준적인’ 해석가들은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 두 단계에서 뚜렷히 구분되는 명백한 충돌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뜻을 같이 한다. 최근 해석가들은 후기 사상에서 발견되는 근본적인 언어-치료(즉, 언어 비판의 역할로서 철학적 질병을 치료한다고 하는)의 시작이 초기 사상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표준적 해석에 도전하는 입장이다.



REF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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