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왕은 13인의 기사들과 함께 원탁에 앉아있다. 13인은 예수의 제자를 뜻하며 가장 우수한 기사들만이 원탁에 앉을 자격이 있었다. 그들은 가치 있는 물건이라 생각되는 성배를 찾으러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성배가 무엇인지 어디에 존재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각 기사들은 각자의 시점으로부터 '가장 어두운 지점'으로 들어가 성배와 성창을 찾기 시작했다. 비극적이게도 성배는 끔찍하게 생긴 붉은 용(Red Dragon)이 지키고 있었으며 영생을 가진 이 포식자와 함께 놓여져 있었다. 이 괴물은 기사들을 쉽게 죽일 수 있었지만, 성배와 성창 그리고 금은보화를 갖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서유럽 브리튼의 아서왕(King Arthur) 『원탁의 기사』의 일부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원탁은 평등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성배와 성창은 가장 가치있는 물건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을 찾으려 하며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 이것을 쉽게 얻을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는 물건이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우리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거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히 익숙한 곳에 있지 않다. 성배와 성찬을 얻을 수 있는 곳이란 사실 우리에겐 ‘무지의 공간’, ‘혼돈의 공간’, '어두운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방향일 것이다. 여기에서의 교훈은, 만약 우리가 현재 하는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면, 가지 않았던 곳이 비로소 우리가 가야할 곳이라는 것이다.
괴물과 성배는 현실을 반영하는 역설적인 관계를 뜻한다. 밖으로 나가 현실을 마주하고 그것이 제공하는 것을 통합해야한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매우 위험한 것이며 한계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삶적인 실재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이다. 만약 그러한 어려움이 우리에게 놓여져 있지 않았다면, 가치 있는 것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를 얻지 못하며, 용과의 대면 없이는 금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다.
예컨대, 우리는 가끔 지나치게 우호적인 사람이 되길 원하고 갈등을 싫어하고, 자기 자신을 위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과 도발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성향을 좋지 못한 성품으로 간주한다. 이것을 표현하면 아주 불쾌해지기도 하며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곳이 바로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가 가야할 곳이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할 줄 아는 이는 역설적이게도 싸움을 대면할 상황이 적어진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 광장에는 두려워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고, 당연히 그 곳에 가고 싶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다잡고 올곧게 행동하고 싶다면 정확히 그곳이야 말로 가야할 곳이다. 즉, '찾고 싶은 것은 본인이 가장 원하지 않는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상 과학 패러다임이 문명의 사고를 지배하기 전, 인류는 자신들의 삶을 하나의 연극이나 신화로 이해하였다. 근대 과학을 인식의 준거로 삼은 지는 고작 500여 년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이전에는 가장 오래된 책인 성경, 그리스 비극과 신화, 구전 소설 등의 위대한 유산은 삶을 이해하는 수단이자 삶을 의미로 환원시키는 시도였으며 삶을 변화시킬 판단 기준이었다. 이들은 일명 고전으로서 인간의 총체적 지혜/고뇌/질서의 힘을 갖고 있다. 경험 과학과 대비된다는 비판 정도로 이 유산을 무시하기에는 여전히 삶의 질서를 관장하는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