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국내 한 보험사가 교통사고로 일순간에 고아가 된 초등학생에게 구상권을 청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형 보험사가 변제 능력이 없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국민의 공분을 사기 충분했습니다. 관련 기사가 보도되자 해당 보험사는 사과문을 올리며, 구상금 철회 의사를 밝히며 일단락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분노했던 것일까요? 보험금 청구 과정을 겪어 보신 분들은 "그 어린것이 어떻게 보험사와 맞서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더 측은한 감정과 분노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보험사와의 경험은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미국의 한 보험사는 고객들에게 테슬라, 애플과 비슷한 수준의 NPS(고객 추천지수)를 받는다고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레모네이드'입니다. 지금부터 레모네이드에 투자한 3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테슬라, 애플 그리고 레모네이드의 NPS(고객추천지수)
#1. 보험산업은 크지만 아주 낡은 집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심리적, 육체적 안정감을 원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본능'을 파고든 것이 바로 보험업입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이를 극복할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험의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최초의 사망보험은 15세기에 등장합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국가의 선원들이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상 사고가 나면 금전적 손실이 크게 발생하고, 혹여 피랍되기라도 하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이런 리스크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선원들은 사망보험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산업의 변화에 따라 화재보험, 생명보험도 차례로 등장하게 됩니다.
보험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그 시장의 크기도 크고, 전 세계 수많은 보험사가 있습니다. 전 세계 총 보험료는 약 5.3조 달러(한화 5830조 원) 규모입니다. 또, 2020년 포춘지 선정 100대 기업에 11개가 보험회사이며, 다우 지수 포함 종목에는 United Health Group(의료보험)와 Travelers Companies(손해보험)가 포함되어 있을 만큼 수요가 꾸준하고 탄탄한 산업입니다.
2000년~2018년 전세계 지불 보험료 증가 추이. 출처 : Statista
2020년 포춘 선정 100대 기업 중 보험 관련 기업
눈썰미가 좋으신 분들은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위 11개의 기업은 나이가 꽤 많이 들었습니다. 올해를 기준으로 평균 113살입니다. 가장 오래된 기업은 1845년 뉴욕에 설립되었습니다. 그즈음에는 공산주의가 유럽을 휩쓸었고, 고종 황제가 태어나기 7년 전입니다.
누군가는 '기업의 유구한 역사은 오히려 기업의 자랑이 아닌가?'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험업은 재구매율이 높고, 매출이 안정적으로 나오는 사업이다 보니 '변화'가 할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막대한 자본금이 필요한 진입장벽으로 인해 새로운 플레이어가 기존의 시장에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수세기 동안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레모네이드의 CEO, 다니엘 슈라이버는 '혁신'의 기회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혁신은 무엇일까요?
레모네이드는 고객들이 기존 보험회사에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주목했습니다. 보험회사와 고객은 왜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고객과 보험회사는 보험료를 가지고 '제로섬 게임'을 하기 때문입니다.
보험사는 기존 납부된 보험료를 바탕으로 영업이익을 최대로 늘리기 위해 고객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덜 지급하는 방향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고객에게 보험금으로 1,000만 원을 지급하면 보험회사는 1,000만 원을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고객과 보험사를 대립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왜 그렇게 보험 약관은 길고 글씨는 깨알 같은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더 이해하기 어렵고 발견하기 어려울수록 보험료 지급 거절이 쉽기 때문입니다.
레모네이드는 고객과 싸울 수밖에 없는 이 전쟁터에서 '고객'을 최우선시합니다. 그들은 이 갈등관계를 어떻게 풀어냈을까요? 레모네이드는 고정된 수수료율(현재 25%)을 보험료에서 취하고 나머지 75%는 보험금 지급과 재보험 가입비로 지불합니다. 보험 계약(통상 1년)이 끝나는 시점에 고객이 지불한 금액이 남아 있다면 고객이 원하는 단체에 기부하게 됩니다. 고객은 자신의 보험료를 통해 지역 사회 혹은 특정 집단(여성 자산 단체, 동물 보호 단체 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레모네이드는 '재보험 시스템'과 '기부 시스템'을 통해서 고객에게 보험금 지급을 하지 않을 이유를 구조적으로 없애버립니다. 이를 통해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고객'의 가치관과 함께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줍니다.
레모네이드는 일정한 수수료(Flat fee)만 취한다.
레모네이드 재보험 구조. 참고 : https://seekingalpha.com/
세상에 없던 보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낸 레모네이드. 고객과 상생하며 고객에게 즐거운 경험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대한 보험업에 게임 체인저가 되기에는 어쩐지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2. 레모네이드는 사실 테크 기업이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지 한 번 떠올려 봅시다. 다윗이 창과 방패를 들고 골리앗과 붙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식민지가 되었겠죠? 다윗은 본인이 원하는 싸움 방식을 택했고 결국에 승리하였습니다. 레모네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 보험사와 정면으로 붙었다면 지금 우리는 레모네이드라는 기업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레모네이드의 '돌팔매'는 무엇일까요?
작고 자본금도 없어 보이는 레모네이드 보험상품에 가입하는 것은 고객들에게 도전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상냥한 마야(Maya)를 만나기 전엔 말이죠. 마야는 실제 레모네이드에 근무하는 직원을 모델로 한 AI 채팅 프로그램입니다. 레모네이드는 고객이 가입을 원할 때,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픈 수십 장의 보험약관이나 가입신청서 대신에 마야와 대화를 하도록 만듭니다. 고객들은 마야와의 대화를 보험 가입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보험금 지급 과정에서도 레모네이드는 AI 기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I 짐(Jim)을 통해 고객들은 디지털 프로세스를 통해 보험금을 청구합니다. 보험금을 청구하기 위한 절차는 놀랍도록 간단합니다.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짧은 동영상을 올리면 AI 짐은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문제가 없다면 바로 보험금을 지급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사고는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고 이에 빠르게 대처하려면 보험금이 빨리 지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보험금은 원래 지급할 때까지 오래 걸리는 거야. 보험금이 지급되기만 해도 다행이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90초 안에 가입하며, 3분 안에 보험급 지급이 이루어지는 레모네이드
레모네이드 보험금 청구 과정, 보험 사기를 찾아내기 위한 프로세스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귀찮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투명하고 간단하며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열광하는 서비스의 대부분은 이런 점을 충족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밀레니얼, Z 세대에게 위와 같은 가치가 하나의 뉴 노멀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레모네이드는 너무나도 단순한 이런 가치에 집중하여 고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AI 기술을 통해서 말이죠.
레모네이드의 AI 기술은 고객에게 좋은 경험뿐 아니라 비용 절감을 통해서 경쟁사에 비해 낮고 합리적인 보험료를 책정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보험회사는 영업사원을 통해서 계약을 하고, 매스컴 광고를 통해서 브랜드를 알리는데 많은 돈을 사용합니다. 레모네이드는 AI 마야를 통해서 영업 비용을 절감시키고, 비싼 광고 대신 레모네이드 고객이 주위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전략을 택해 보험료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레모네이드와 경쟁사의 주택소유자 보험료 비교
다니엘 슈라이버 CEO는 데이터와 이를 활용하는 AI 기술이 레모네이드의 핵심적인 역량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 보험 가입 과정에서 휘발되는 고객의 행동을 AI 마야가 모두 흡수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고객 집단 분류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게 고객 집단을 분류하고 합리적인 보험료 체계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합리적인 보험료 체계는 곧 손해율의 개선으로 이어져 19년 1분기 87%에서 20년 2분기 기준 67%까지 낮아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레모네이드의 여러가지 AI. 출처 : sec.gov
레모네이드 손해율 추이
정리해보면, ① 고객에게 즐거운 경험을 주고 ② 이는 가입자가 늘어나 빠르게 성장하게 됩니다. ③ 성장 과정에서 레모네이드는 데이터를 더 많이 모을 수 있게 되고, ④ 이는 AI 기술을 통해 더 나은 고객 경험을 전달합니다. 이 선순환 고리는 계속 이어져 더 나은 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레모네이드의 'Fly wheel'
#3. 고객의 라이프 사이클과 함께 하는 레모네이드
저는 고객이 성장함에 따라 동반 성장하는 구조를 가진 기업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객의 성장을 옆에서 기뻐해 줄 수 있고 고객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업은 고객의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레모네이드는 고객과 함께 성장하고 싶어 하고 실제로 잘 해내고 있습니다.
레모네이드의 고객 구성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입 고객의 87%는 레모네이드를 생애 첫 보험사로 택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비중의 고객이 레모네이드를 택했을까요? 고객의 연령 분포를 보면 조금씩 이해가 갑니다. 레모네이드 고객의 75% 이상이 34세 미만의 고객입니다. 디지털 접근 방식을 취하는 레모네이드는 MZ세대에게 친근하게 다가왔고, 이는 가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레모네이드 고객의 나이 분포와 첫 보험사로 레모네이드를 택한 고객의 비중
최근 주목받는 마케팅 트렌드인 'MZ 세대'가 고객 연령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MZ세대의 현재 경제력은 그 위 세대보다 현저히 낮아 사업성이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고 사회에 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고 자산도 많아지게 됩니다.
25살의 레모네이드 고객의 라이프 사이클. 출처 : S-1 Filings
레모네이드가 지속적으로 고객에게 만족을 준다면, 다른 보험 상품으로 갈아타거나 추가로 가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레모네이드는 단 한 푼의 마케팅 비용 지출 없이 고객들에게 업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2020년 기준, 실제로 9.8%의 주택 소유 보험 고객은 세입자 보험에서 출발하여 발전한 케이스라고 합니다. 또, 3년 전에 세입자 보험에 가입한 고객들은 평균 56%의 추가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습니다.
가입 고객의 3년 간 보험료 납부 규모 추이. 출처 : sec.gov
#4. 레모네이드에게 바라는 점
레모네이드가 창립 이후 보여준 성과는 놀랍기만 합니다. 2020년 2분기 기준으로 보험 가입 고객의 수는 2년 전 보다 5배에 가까운 성장 수치를 보였고, 고객 별 보험료는 36% 증가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지표를 곱한 수치, IFP(In Force Premium)은 6.7배 가까이 성장하였습니다. 이 기업의 눈부신 성장에 이견은 없을 듯 보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객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매출 또한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2020년 3분기 기준 고객의 수, PCC, IFP. 출처 : sec.gov
사업 확장에 있어서 생명보험, 자동차 보험 등 다양한 보험 상품을 추가하는 것도 좋겠지만 좀 더 발전된 보험의 형태가 되면 어떨까요?
우리는 만약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도, 보험금을 수령할 일이 없는 것이 제일 좋다고 느낍니다. 레모네이드가 가지고 있는 방대한 고객 데이터와 높은 수준의 AI 연산 기술을 통해서 고객의 리스크를 적극적으로 관리해주면 어떨까요? 간단한 방법으로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고객의 생체 정보를 수집해서 건강 상태를 체크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나아가면 IoT 디바이스를 통해 고객과 실시간 상호작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위험 시 즉각 경고를 해줄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차에 블랙박스 혹은 전/후방 추돌 장치와 같은 안전장치가 있거나 T-map '안전운전자'로 분류되면 자동차 보험료를 일정 부분을 할인받습니다. 대부분의 보험사에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지만 이미 낮은 수준의 고객 리크스 관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고 이후 보험금을 지급하는 수동적인 전통 보험사에서 개인의 리스크 관리 역할을 해주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면 더 높은 단계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레모네이드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수직적 통합을 이뤄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