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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원형 Oct 24. 2021

살아있다는 건 시드는 거야


<살아 있어/ 나카야마 치나츠/ 사사메야 유키/ 엄혜숙 옮김/ 보물상자>

 

최원형


춥다는 핑계로 창문을 여는 일이 줄어들다보니, 집안에 뭉쳐 돌아다니는 먼지가 한 움큼씩 눈에 띈다. 이 상태론 질식할 듯한 기분이 들어 며칠을 몸살하다 드디어 볕 좋은 날, 창문을 모조리 열어젖히고 툭툭 털며 신나게 청소를 했다. 청소를 하고 나니 춥게만 느껴지던 기온도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따뜻한 물 보온병에 담고 초콜릿 두어 개를 챙긴 다음, 뒹굴 거리는 두 녀석들을 꼬드겨 집 뒷산엘 올랐다. 그동안 겨울이라고, 춥다고 웅크리고만 있었던 건 순전히 내 게으름의 또 다른 변명이었던 걸까? 걷다보니 생각과는 달리 콧등에 땀방울이 송글거린다. 얼떨결에 함께 따라나선 아이들도 간만의 신선한 공기에 기분이 상쾌한 듯했다. 산길을 좀 걷다가, 이게 뭐지? 하는 작은 아이의 말소리에 들여다보니 까만 열매가 말라비틀어진 채 역시 바싹 마른 가지에 붙어있는 게 보였다. 댕댕이덩굴 열매다. 빨간 색깔의 산수유 열매도 수분이 날라가 쪼그라들긴 했지만 몇 개 붙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빨간 열매, 까만 열매. 먹을 것이 곤궁한 겨울 숲에서 이런 열매들은 새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일까. 

열매처럼 생긴 벌레집
겨울까지 남아있는 열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큰 아이가 ‘여기도 열매가 있어’, 라고 말해 모두들 그리로 가보았다. 참나무 가지에 붙은 갈색의 동그란 것이 꼭 열매다. 쳐다보니 많이도 달려있다. 동그란 모양이 구슬치기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싶다. 그런데 그건 사실 열매가 아니라 충영이다. 충영은 말하자면 벌레집이란 뜻이다. 참나무혹벌이 만들어 놓은 벌레집인데 지난 가을에 참나무 잎에 빨간 열매가 붙어 있던 기억이 났다. 잎 중간에 있으니 그걸 열매라 생각하긴 어렵지만 열매처럼 빨갛게 익어가니 착각하기도 쉽다. 참나무잎구슬혹충영(또는 참나무잎붉은혹벌충영)이라는 건데, 진짜 열매처럼 익어가고 겨울에는 갈색으로 변한다. 그게 열매가 아닌 벌레집이라는 걸 알고 나면 뭔가 좀 속은 기분이다. 혹벌이 식물의 조직에다 알을 낳으면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가 식물의 즙을 빨아 먹게 되고 그러다보니 조직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생긴 모습이 꽃모양이 되기도 하고, 열매 모양이 되기도 한다. 생태를 들여다보면 서로 돕는 상생관계도 있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 쪽을 이용하는 기생관계도 있다. 말하자면 충영은 기생관계다. 그러나, 기생하는 생물을 다 나쁘다고 할 순 또 없다. 생태계에서 생물의 수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혹벌을 비롯한 기생벌들의 역할이기도 하니까. 다양하게 존재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그 자체가 바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니까.

서로 서로 연결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
충영이야기를 들으며 살짝 흥미가 당겼던 아이들은 이내 시들해졌다. 겨울숲에 볼거리가 딱히 없는데다 열심히 걷던 발걸음이 충영을 들여다보느라 느려졌더니만 추위가 몰려온 거다. ‘우리 헛둘헛둘 빠른 걸음으로 가 볼까?’ 이러면서 분위기를 좀 띄워보려는데 아이들은 이제 안 속는다는 듯이, ‘볼 것도 없는 데 더 가면 뭐해. 그만 내려가지’, 이구동성으로 이런다. ‘아냐, 왜 볼 게 없어.’ 두리번거리는데 덩굴이 나무줄기를 감아 올라간 것이 보인다. ‘야, 저것 봐라. 덩굴이 나무줄기를 칭칭 감고 있네. 아, 되게 답답하겠다.’ ‘왜 답답해요?’ 금세 아이들이 관심을 기울인다. ‘누가 내 목을 꽉 조인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숨 막히겠니?’ 실제로 덩굴이 줄기를 파고 들어간 모습을 나뭇잎이 없는 겨울 숲에서 관찰하기란 어렵지 않다. 도심 가로수에 보면 더러 전깃줄이나 현수막을 걸다가 내버려둔 줄들이 나무줄기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거다. 그 이야길 했더니 아이들 관심을 기울이며 덩굴을 들여다본다. 덩굴은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간 것도 있고 왼쪽으로 감아 올라간 것도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칡의 경우, 줄기 위에서 내려다보면 시계가 도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감아 올라가고, 인동이나 박주가리 같은 식물은 시계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덩굴이 감고 올라간다. 칡은 동아줄을 만들만큼 질기니 이런 덩굴식물이 감고 올라간 나무는 결국 고사를 하고 만다. 그래서 숲에서 칡덩굴을 만나면 부러 잘라준다는 사람들도 있다. 내 생각에 모든 건 자연의 순리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감고 올라가는 나무가 있어야 칡이 살 테고 칡이 있어야 칡꽃의 꿀을 먹으러 오는 곤충들이 살 테고 곤충이 살아야 그 곤충을 잡아먹는 새나 다른 동물들이 살 테고... 결국 자연에 존재하는 만물은 서로 연결 지워진 삶을 사는 거니까.

살아있다는 건 뭘까?
덩굴에 가졌던 흥미도 약발을 잃고 이젠 진짜 내려가자며, 큰 녀석이 말한다. ‘겨울 숲엔 살아있는 게 너무 없어.’ ‘살아있다?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건 뭘까?’ 아이들은 순간 어리둥절해 한다. 살아있다는 게 뭔지는 설명하기 이전부터 그냥 알아왔던 건데, 엄마의 질문에 뭐라고 콕 집어 말로 표현하기가 야릇한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만, ‘숨 쉬는 거.’ 두 녀석이 거의 동시에 이런다.

“살이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다는 건 어떤 거지?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숨 쉬는 거네“


  


<살아 있어/나카야마 치나츠 글/ 사사메야 유키 그림/엄혜숙 옮김/보물상자>


이 책이 두 아이들 머릿속에서 동시에 떠오른 거다. 내가 ‘반칙이야, 너희의 생각을 말 해보아.’ 했더니만, ‘음... 살아 있다는 건, 미래가 있는 거’, 좀 컸다고 큰 녀석이 이런다. ‘미래?’ ‘그래요. 이 숲에 나무들, 잎도 하나 없이 다 죽은 거 같지만 봄이 오면 또 새 잎이 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미래가 있는 거죠.’ ‘오, 좋아. 그럼 너는?’ 작은 녀석의 생각도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는데 그 순간 어치가 포르륵 날아갔다. ‘새!’ 그러고는 까르르 웃는다. ‘새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뭐야?’ 그랬더니만, ‘그럼 날아가는 새가 죽은 거예요? 살아있으니까 날지.’ 


어느 새 우리 셋은 이 그림책을 머릿속에서 넘기며 낄낄 거리기 시작했다, 그 추운 겨울 숲을 내려오면서.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움직이고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움직이는 거네

하지만 풀은 움직이지 않아

나무도 움직이지 않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그래도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시들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시드는 거네”


‘가만, 살아 있다는 건 시드는 거래,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겨울 숲은 온통 시든 것투성이던데, 그렇다면 겨울 숲이야 말로 살아 있는 거잖아.’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을 좀더 진지하게 들여다봤다는 것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은 온통 생생한 것뿐만 아니라 시들어버리는 것조차 살아있다고 말해주는 거. 키우던 꽃이 시들어 으아앙 우는 아이의 눈물에서 살아 있다는 건 눈물이 나는 거라는 데로 뻗어가는 생각.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쉽고 풍부하게 보여 주고 있어 큰 감명을 받았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내게도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살아 있는 것은 예외 없이 죽음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그 진리를 아이들에게 쉽게 이야기해 주는 책. 그러나 ‘살아 있는 벌레를 물고기가 먹고, 살아 있는 물고기를 새가 먹고, 살아 있는 새를 짐승이 먹’는 생명의 그물을 쉬운 말로 써내려간 작가의 시선이 놀랍다. 생태계의 모든 생명은 다 연결고리를 갖고 있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이 운명 지워진 것, 그걸 딱 아이의 눈높이만큼에서 써 내려갔다.


겨울 숲은 모두 사라진 듯하지만 숲 바닥에 쌓인 낙엽만 살짝 들추어도 벌레집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모두 사라진 듯한 숲은 지금, ‘살아 있다는 건 시드는 거네’를 말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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