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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원형 Oct 22. 2021

생명을 먹을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먹어야 할까?

생태와 그림책읽기

생명을 먹어요/우치다 미치코 글/ 모로에 가즈미 그림/ 사토 고시 감수/ 김숙 옮김/계림북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도 생태감수성이 있을까?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단연코 있다고 한다. 우리들의 유전자에는 원초적으로 사바나 초원에 대한 기억이 내재해있다고 그는 단언했다. 그래서 숲에 가면 편안함을 느끼고, 자연이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걸까? 나 자신을 두고 봐도, 또 내 아이들을 생각해도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도시에서 나고 자랐어도, 가을 숲의 푹신한 낙엽 위를 뒹굴 때 아이들 표정이 얼마나 행복한 얼굴이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그렇다. 비 오는 날 만난 달팽이 한 마리 때문에 유치원 가는 길도 잊고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며 경이로워하던 아이의 눈빛은 지금도 형형하게 내 뇌리에 남아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도시는 아이들 내면에 잠재해있는 생태감수성을 꺼내 발휘하기엔 많이 안타까운 공간이다.


커다란, 그래서 때론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는 송아지의 눈망울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에게 마트에서 파는 시뻘건 고깃덩이가 그 소에서 왔다는 것을 알기란 정확히, 불가능하다. 마트에서 부위별로 잘라 깔끔하게 포장되어 팔리는 고기를, 어느 순간 나조차 그게 소의 한 부분이었다는 생각을 잊고 살게 되었으니까. 단지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오직 그 목적으로 세상에 나와 사육되면서 단 한 번도 풀밭을 밟아보지 못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있는 소. 그 소의 부분 부분이 ‘꽃등심’ ‘차돌배기’ 등의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되어 마트에 팔리고 있는 일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태계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은 다른 생명을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먹어야할 것을 먹는다는 당당하고 일관된 태도로, 그리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먹어도 되는 걸까?


우연히 발견한 이 책, <생명을 먹어요/계림북스>는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바로 얼마 전까지 온기가 흐르던 생명이었다는 인식조차 없이 살아오던 내게 센 펀치를 날렸다. 아빠가 도축장에서 소 잡는 일을 하는 시노부는 어느 날 학교에서 아빠 직업을 소개해야하는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도축장에서 피가 잔뜩 묻은 아빠의 모습을 봤던 시노부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자그맣게 ‘정육점에서 일한다’고만 말한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가 있겠냐며 시노부 아빠의 직업은 정말 훌륭하다고 말이다. 시노부가 아빠 직업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 정말 싫어 날마다 오늘만, 오늘까지만 하며 조만간 관두어야겠다던 사카모토 씨는 아들 시노부가 전하는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느 날, 사카모토 씨의 도축장으로 소를 실은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그때 조수석에서 한 여자아이가 뛰어내리더니 짐칸으로 올라갔다. 짐칸에는 소가 있을 것이므로 위험할 텐데도 그 아이는 트럭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대신, 사카모토 씨가 가까이 다가간 트럭에서는 여자아이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미야, 미안해.

미야, 미안해.

할아버지가 그러는 거야.

미야가 고기가 되지 않으면 우리가 설을 쇨 수 없다고.

미야를 팔지 않으면 우리가 힘들어진다고 말이야.

미안해, 미야. 미안해.”


그 아이는 소의 배를 문질러 주면서 애절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 장면을 들으며 사카모토 씨는 다시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낀다. ‘이제 더는 할 수 없다, 그만 두겠다’고.


집에 돌아와 아들 시노부에게 소와 여자아이 이야길 들려준다. 이때 시노부의 태도가 참 인상적이다. 죽이는 일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아빠의 고백에 시노부는 대답대신 한참 동안 침묵한다. 이윽고 아빠에게 미야 일은 아빠가 꼭 해줬으면 좋겠다고 욕실에서 아빠의 등을 밀며 부탁한다. 아빠에게서 전해들은 소와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시노부에게 어떻게 다가갔을까를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생각해보게 된다. 시노부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연민의 씨앗이 그 순간 발아를 했다고 해도, 차라리 ‘우리가 미야를 살려줘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어린 아이의 마음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어린 시노부도 미야는 결국 고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던 걸까?  


“아무래도 아빠가 하는 게 낫겠어.

아무에게나 맡기면 미야가 더 괴로울 거야.

아빠가 해 주면 좋겠어.”


시노부의 이 말을 나는 몇 번이고 곱씹어 봤다. 시노부는 누구보다 아빠가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신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미야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두려워할지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 해도 아빠라면, 적어도 미야의 괴로움은 덜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아빠가 생명을 죽이는 일로 괴로워하던 그 마음에서 이미 읽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먹기 위해 사육되고 있는 가축이 세계인구의 열배인 6백억 마리 정도일 거라 추정하고 있다. 인류는 1961년에 7천1백만 톤의 고기를 소비했지만 2007년에는 2억8천만 톤 이상을 식용으로 소비했다. 길에 나서면 널린 곳이 고기 집인 것만 봐도 가파르게 고기 소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게 읽혀진다. 게다가 이렇게 길러지는 가축 가운데 4억 5천만 마리의 가축들이 공장식 축산으로 키워진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해내듯 가축들은 오직 우리들의 수요에 걸맞게 살코기, 알, 우유를 생산(?)하고는 생을 마친다는 거다. 이런 시스템은 소비자들이 더 많은 고기를 더 빨리, 그리고 더 값싸게 소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소비가 증가할수록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지는 가축들의 숫자도 점점 더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독방에서 먹고 싸며 살만 키우다 가는 소의 수명은 고작 4년이라 한다. 소의 자연수명이 평균 20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오싹하다. 닭이 달걀을 낳기 위해 사육되는 상자용 닭장 크기는 A4용지만 한데, 그 안에 평균 6마리가 들어간다. 스트레스로 서로 쪼는 걸 막기 위해 부리는 태어나자마자 잘려진다. 닭의 자연수명은 10년이지만 오늘 날 닭의 수명은 6,7주가 고작이다. 이나마 암컷의 경우다.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분쇄기로 들어가 비료나 사료가 된다고 한다. 바삭하게 튀겨진 치킨을, 혹은 지글거리는 삼겹살 로스를 먹는 것이 이러한 가축들의 고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먹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무겁기만 한 주제인데도 이 책이 생각보다 가볍게 읽혀지는 건 그림이 한 몫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글과 그림이 서로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메시지 전달을 선명하게 할 때 그 그림책을 훌륭하다고 평한다면 이 책은 그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 할 수 있다. 마치 아이가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초벌 그림 같기도 한 자유로운 그림이 ‘생명’이라는 낱말 안에 내포된 무게감을 조금은 덜어준다. 사카모토 씨의 그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마구 엉킨 실타래 같은 그림 속에서(40-41쪽) 느껴지기도 하고, 미야를 떠나보내는 여자아이의 미어질 듯 슬픈 심경이(28-29쪽) 그림을 타고 전해져 온다. 누군가가 실제 경험한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음식이란 것이 어디서 어떤 과정을 지나 식탁에 오르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가령, 내 몸을 지탱하기 위해 먹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는 사카모토 씨가 미야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했던 장면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소를 잡아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카모토 씨는 다시 한 번 말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해. 알았지? 가만히 있어야 해.” 

미야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미야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맺혀 떨어졌습니다.

사카모토 씨는 소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사카모토 씨가 총같이 생긴 도구를 머리에 댔습니다.” 


채식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생명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구조, 이 구조 속에서 생명을 대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예의를 이 책을 통해 찾아보자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먹어야하는 것이라면 그건 최소한의 양으로 그리고 가장 겸허한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안타까운 생명을 먹은 대가는 정말 보람된 일을 하는 것으로 갚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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