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에서 강의를 하려면
제출해야할 서류가 좀 많다.
사실은 너무 많다.
내가 보기에 굳이 이런 걸 다 작성해야하나 싶어
가능하면 나는 좀 생략하는 편이다.
핑계를 대면서..
그럼에도 꼭 작성해야 하는 게 미투 이후 성범죄조회서다.
온라인으로 강의를 하는 경우라고 해도
공공기관은 이걸 꼭 요구하는데
수신자가 각 지역의 경찰서다.
처음 이걸 작성할 때는 기분이 상당히 불쾌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둔감해졌다.
지난 주 경기도 모 도시의 공공도서관에서 강의를 위해 서류를 제출해주십사 했는데
으레 성범죄조회서도 끼어있었다.
pdf파일로 서류가 오면 애플펜슬로 작성을 해서 보내는데
그날 따라 애플펜슬이 말썽이어서 손가락으로 써서 보냈다.
며칠 뒤 도서관에서 연락이 왔다.
반드시 자필 작성을 해야 한다며 다시 보내달라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댄다.
손가락 글씨여서 좀 그랬나 싶고 어쩐지 내가 장난을 친 것 같아서
흔쾌히 애플펜슬로 작성을 해서 보냈다.
오늘 아침에 메일이 한통 도착했는데
반드시 자필로 작성해서 보내달라는 거다, 경찰서에서 또 반려를 했다고...
이쯤되니까 이 강의를 하고 싶지 않았다.
메일에 답장을 쓸까 하다가 담당 사서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강의를 못하겠으니 다른 강사를 구하라고 하고는
그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주 버럭질을 한 거다.
이렇게 하고나면 언제나 따라오는 것은 후회다.
찰나는 후련하고 뒤이은 후회와 괴로움은 오오래 간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얼른 사과를 하거나
내 행동의 정당성을 찾거나
내 행동의 정당성은 몇 된다
그동안 수많은 경찰서에서 이렇게 디지털로 서명한 것에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금융거래를 하는 은행도 모두 디지털 서명으로 바뀐 시대다.
그러니 그곳만 유독 권위를 부리는 거라는 생각
그 생각에 사로잡히니 중간에서 제대로 일처리를 못한 담당자까지 답답하게 여겨졌다.
나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 같아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 불쾌한 감정에까지 다다르고 보니 그 불쾌감이 내게서 떨어지질 않는 거다.
결국 생각을 멈췄다.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 행동이 정당하다고 해도 결국 벌컥 화를 낸 내 행동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화를 내는 행위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으니 그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이쯤 생각하고 나니 얼른 사과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강의를 다시 할 생각은 그럼에도 없었다.
경찰서에서 계속 서류를 다시 작성해오라는 요구가 사라지지 않는한.
전화통화를 하면서 어쨌든 내 행동이 경솔했던 지점에 대해 사과를 하고
경찰서쪽의 자잘못도 이야길 했다.
특히 디지털로 바뀐 지가 언젠데 여태 이런 걸로 계속 서류를 반려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경찰서에 전해달라고 했다.
통화를 마치고 났는데도 감정은 풀리질 않는다...
오후 내내 일을 하면서도 이따금씩 그 감정들이 올라오곤 했다.
그러다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통화를 하면서 경찰서에서도 미안해한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디지털 서명으로 바꿔야 하는데 그곳은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디지털 서명이 위조가 되어서 낭패를 본 경험도 이야길 했다고 한다.
세상사가 이런 것 같다.
띄엄띄엄 전달되는 말 속에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내재돼 있다는 걸
시시때때로 잊고 산다.
한번 생각의 길이 나기 시작하면 그 길말고는 길이 없다.
미안해한다는 바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불편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좀 전까지 경찰서에서 권위를 부린다고 생각했던 데서
내가 주변을 정말 배려하지 못하고 나 중심적으로 사고하는구나..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부끄러웠다.
아침에 읽은 글 가운데,
인간이란 추상적 한 덩어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이고,
인간은 누구나 벌레이면서 스스로 성인(聖人)이라는 걸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배려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벌레일 수도 성인일 수도 있다는 걸
결코 길지 않은 시간에 깨달았다.
돌아서면 또다시 윤회할 테지만
그럼에도 간격은 좀 넓어지지 않을까?
2022.2.24
*날마다 그림 26일차
아침에 메일을 읽고 들었던 내 감정은 바로 이랬다. 문을 열줄 몰라서 들이받은 코뿔소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