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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원형 Apr 09. 2022

집착을 정리한 날


토요일 아침, 느지막히 일어나서 빈둥댈까도 싶었지만

이런 마음 먹은 날은 여지없이 일찍 눈이 떠진다


프리랜서는 일이 끝이 없다

스스로 조절하지 않으면 일과 휴식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그냥 계속 일을 하게 된다.

오늘은 작정하고 일을 작파하기로


미루고 미루던

봄맞이 대청소로 서가를 정리하겠다는 목표를 결국 오늘 해냈다.

벚꽃은 이제 지기 시작하는 마당이나

더 늦기 전에 정리를 해야지 책에 집 전체가 깔릴 지경이었으니


콩쥐는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팥돌이는 프로젝트 땜에 역시 학교로 갔다.

집안 최고 연장자는 주무시고

나 혼자 서가에 있는 책들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거의 다 내 책이니 내가 솎을 수밖에..

몇 군데 연락했더니 보내달라며 고맙다는 인사까지 미리 받았다.


큰 박스로 대략 10박스를 골라낸 것 같다.

고르면서 그냥 이걸 끼고 살까 하는 마음이 얼마나 일어났다 사라지던지

그럴 때마다 이 물거품같은 인생에 뭘 이리 집착을 하느냐

스스로에게 되묻고는 미련 없이 책을 솎아냈다.


갑자기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물까치다.

얼른 달려가 창밖을 내다보니 적어도 대여섯 마리가 떼로 몰려다니며

앞동 에어컨 실외기에 올라앉았다가 이동하기를 반복한다.

반가워라.

물까치는 그 고운 깃색과는 대조적으로

소리가 무척이나 개성넘친다, 좋게말하면!

미련을 떨구는 걸 응원이나 하듯이 요란스레 지저귄다.


내가 하고 있는 분야와 내가 관심있는 몇몇 작가의 책만 남겨두고

아이들 어릴 적 읽던 동화 가운데 몇 차례 정리하면서도 여전히 끼고 살던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이중서가의 뒷칸은 아직 제대로 정리를 못했지만

일단 앞쪽은 어느 정도.

그래봤자 집안에 있는 서가 가운데 겨우 두 군데를 정리했다.


누워있던 책들이 이제 제자리를 찾고

서가에 빈틈도 조금씩 생기니

새롭게 책으로 또 채울까 하는 마음이 인다.


동화책들을 쌓으니 네 줄이 되었다.

일단 엘베 앞에 신문지를 깔고 네 줄로 세워서

쏟아지지 않을 정도로 해두고는

메모를 남겼다.

혹시 필요하면 가져가시라고


저녁 무렵 벨소리가 나 인터폰을 여니 앞집 식구들이다

오렌지를 들고 서 있네

책 고맙다며

살펴보니 세 줄로 줄었다.

아이들이 어린데 그 연령에 맞는 책을 골라갔나보다.

앞집이라고 해도 거의 만날 일 없었는데

이 기회에 얼굴도 보고 좋다.


일단 내 손에서 떠나가는 결정을 하기까지가 힘든 거지

막상 결정을 하고 나면 집착이랄 게 없다.

그러니 이 마음이라는 거 진짜 믿지 못할 헛 것이라는 생각이다.

집착을 정리하고 나니 개운함이 찾아온다.



20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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