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세종대왕과 조상들의 은덕에 힘입어 올해 10월 우리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은 무려 열흘에 달하는 명절을 선물 받았습니다. 열흘을 오롯이 쉰 노동자 혹시 어디 있습니까? 뉴스에 따르면 열흘을 모두 쉰 노동자는 단 7%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7% 중 한 명이 여기 있습니다. 어쩐지 은혜롭게도 제가 다니는 회사는 이번 연휴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그 날, 9일까지 쉴 것을 허락했습니다. (물론 언론사라는 조직 특성상 가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지지 않았나 살펴봐야 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주시민 여러분)
"추석 연휴에 열흘을 쉴 수 있어!"
9월의 어느 오후
아무튼 그 날 저는 참으로 행복해 집에 돌아와 춤을 췄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시게, 오늘은 또 왜 행복하신가?
-다름이 아니라 노조가 열흘 휴식을 허락했기 때문이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지.
-어디 한 번 콧바람 맞으러 갈 생각 없으신지?
정색했습니다.
-없어. 우리 여름에 세부에서 돈 너무 많이 씀. '김생민의 영수증' 듣고 자중하시길.
그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미 지난 5월 세부에서 큰돈을 탕진하고 왔습니다. 꽤 괜찮은 리조트에서 바다만 바라보며 세상 갑부처럼 맥주를 폭포처럼 들이마시며 2박 3일을 보냈죠.한 번 보여드릴까요
꿈이었나... 세상 행복했어..

하지만 무려 열흘 아닙니까. 여행 중독이자 외국병 중독자인 저는 이 열흘을 집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단호한 남편을 위해 눈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고 애교 가득한 표정을 발사했습니다.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이 귀여워라.. 근데 안돼.
라며 계속 단호했습니다.
그렇게 이틀 정도 지난 후 그는 결국 스마트폰으로 비행기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운명은 나의 편이고 돈은 쓰라고 버는 법이니까요. 사실 용돈을 깎겠다, 아껴 쓰겠다 등등 각종 (거짓) 약속으로 그를 현혹했습니다.
아니 근데 대체 본인도 월급 받고 직장 생활하는데 내가 왜 이래야 하는 건가... 사실 결혼 전 저의 소비습관은 대략 "돈은 쓰려고 버는 거야"로 요약됩니다. '오늘 일한 이유는 오늘 밤, 퇴근 후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며 물질(옷, 책, 각종 물품)을 사거나 경험(공연, 여행 등)에 투자했습니다. 월급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적당히 저축도 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남미와 아프리카로 떠날 때 필요한 돈을 모으던 중이었죠. 오늘 번 돈을 내일, 내일모레 다음 주도 아니고 10년 후, 20년 후에 쓰겠다는 생각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남편에게 할 때마다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좋은 아파트 기준을 조금 낮추면 돼.... 나는 상관없어 너만 있으면 "이라며 논점 후려치기를 시도합니다. 지성인처럼 보이길 바라는 저의 허세와 내적 욕망을 간파한 전략이죠. 배금주의에 빠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길 원하는 저는 솔직하게 "둘 다 할 거야"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 채 말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글로 적고 보니까 열 받네...)
옛날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이제 이게 프롤로그라서 다음 편부터 여행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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