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11월 27일입니다. 보통 다음 날 입을 옷을 머릿속에 대충 정리하고 자는 편이라 자기 전에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는데, 오늘 눈 소식이 있길래 기껏해야 '눈 반, 비 반' 정도의 날씨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던 가을 산행을 미루고 미뤄온 저를 꾸짖기라도 하듯이 오늘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습니다. 그것도 폭설 주의보가 내려질 정도의 묵직한 눈이 말이죠.
작년 이맘때 즈음 이사를 한 저의 일터에는 정말 운 좋게도 해가 정말 잘 드는 통유리창이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높은 층수에 있는 사무실이어서 제 자리에는 저 멀리 왼쪽과 오른쪽으로 산이 보이는데, 덕분에 올 한 해 계절에 맞추어 자연의 색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매일 관찰하고 하늘의 상태나 구름의 속도를 지켜볼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본 두 개의 추산秋山이 설산雪山으로 한 순간에 바뀌어버린 장관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이번 주말에는 꼭 평소 하던 운동은 잠시 제쳐두고 그 하얀 세상 속에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드디어 작년에 사두고 단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등산 스틱이 바깥 구경을 하게 되었네요. 괜스레 미안해집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달력이 어느새 11월이 되어 있고, 12월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혹은 12월인 경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작년 이맘때의 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희미한 형태만 기억이 날 뿐 정확한 모은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요. 인간이 이 세상을 몇십 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완전히 미쳐버리지 않고 대부분 잘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즐거운 일이라면 모를까, 슬픈 일이나 잊고 싶은 일들을 잊지 못하고 당장 1초 전에 느낀 것처럼 생생하게 매번 떠올릴 수 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이런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겁니다.
다만 그런 기억들은 절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제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단지 그 형태를 바꿀 뿐입니다. 오늘 출근길과 퇴근길에 새빨갛게 물들어 만연한 가을을 즐기려던 가로수 위에 새하얀 눈이 낯설게 내려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로에 심어져 있는 가로수들의 잎은 가지에서 언젠가 떨어져 환경 미화원 분들의 빗자루질 속에 어딘가로 사라져 없어지겠지만, 우리들의 시야에서 없어질 뿐 그 어딘가에서 형태를 바꾸어 다른 모습으로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그 낙엽들의 보금자리였던 곳에는 가을의 색으로 물든 잎 대신 새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을 테지만, 가을의 가로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겨울의 가로수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이렇듯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고 해서 이 전의 계절이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계四季는 어쩌면 단순히 모습을 바꾸었을 뿐 그 본질을 잃지 않은 채로 우리 곁에 항상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비로소 계절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로 새로운 계절을 맞닥뜨릴 때면 그렇게 놀랍거나 새로운 마음이 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흔히 가을 탄다고 하는 것처럼, 특정 계절이 되었을 때 조금은 센티멘털 해지거나 마음속에 슬픔, 공황 같은 불쾌한 흔들림이 은근히 느껴지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되려 하루의 기분은 계절보다는 어떤 이유에서든 머리에 강제로 떠올려지는 것들에 더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나는 어떤 계절이 와도 흔들리지 않아!"라고 밝히는 이유는 제 자신이 많이 변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계절을 타서 기분이 정해지는 타입의 사람이라면, 과거의 저는 모든 계절을 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계절을 만끽함과 동시에 그 반복되는 익숙함 속에서 가르침 같은 것을 찾으려 한다면, 과거에는 모든 계절을 혐오했습니다. 아니, 계절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제 자신을 혐오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저였지만, 그저 모르는 것이 많은 상처 투성이 아이였기 때문에 지금 그때의 저를 만난다면 위로의 포옹을 나누고 싶습니다.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계절을 쉽게 타는 사람들에게 분명 힘든 일이겠지만, 제가 매일 마주하는 두 산속에 살아가는 동물들에게도 힘겨운 일일 것입니다. 겨울잠에 들어야 하는 동물들에게 먹잇감을 구하지 못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도 없을 테고, 분명 많은 동물들이 배고픔과 추위에 고통받다가 생명을 잃게 될 겁니다. 하지만 얼어붙은 땅이 녹아 그 속을 뚫고 용감한 새싹들이 올라오기 시작할 때가 되면, 살아남은 동물들은 죽음의 기운을 몰아내어 다시 힘차게 산속을 뛰어다닙니다. 그렇게 새 생명들이 탄생할 테지만, 그 해의 겨울에는 또 굶주린 동물들이 죽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은 불가피한 성장통을 수반하여 모습을 바꾸어 감으로써 시간이 지나더라도 자연의 섭리라는 약속을 지켜 나갑니다.
저는 산속의 동물들이 그러하듯, 어쩌면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생명의 소실만을 의미한다면,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부적절한 말일 겁니다. 다만 저는 죽음에 대해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너무나도 많은 생각을 해왔던 터라,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지고 성숙해진 지금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리 두렵거나 무서운 존재, 즉 무언가의 끝 만을 의미하는 단어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어제의 내가 죽었음에 오늘의 내가 있다면, 죽음이라는 것은 일종의 변화이자 흐름, 즉 산속에서 계절이 변함에 따라 새 생명이 태어남과 죽어감을 반복하는 자연의 섭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새로 태어난 제가 살아낸 하루는 그 모습을 비슷하게 꾸밀 수는 있겠지만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다시 살 수는 없는 하루입니다.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오늘로 다시 돌아오더라도, 제가 오늘 산 것과 티끌만큼의 차이도 없이 똑같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미래의 누군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자신을 과거로 보내버린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심오한 과학 이야기는 저의 주 분야가 아니기에 가볍게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만큼 오늘 하루는 어제가 죽음으로써, 죽을 수밖에 없음으로써 태어난 소중한 새 생명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가 계절에 맞추어 어떤 모습을 띄더라도 저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하루가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던 그것은 결국 자연스러운 일이고,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소중한 하루이기에 모든 순간을 사랑하고 만끽하고 감사히 여기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좋은 날, 좋지 않은 날 모두가 그렇습니다.
하루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여 오늘의 소중함을 알되, 그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진 않는 묵묵한 중심 속에 머무르기 위해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하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떠오르는 생각들과 제 자신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기 위해 이와 같은 글을 쓰는 작업도 놓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정말 미숙하고, 부족하고, 사방팔방 튀어나가는 생각들의 어설픈 집약 같은 글 밖에 써내지 못하는 솜씨지만, 아마 괜찮을 겁니다. 오늘 쓴 글은 어제의 저도, 내일의 저도 쓰지 못했을 글이기에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고, 그렇기에 이 글을 쓴 오늘의 제가 죽음으로써 다음에 태어난 제가 써내는 글 또한 소중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단지 작은 희망 사항이 있다면, 그 수많은 죽음 후에 배운 것들이 조금 더 나은 글을 써내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마냥 죽기만 할 것이 아니고, 훗날의 저를 위해 무언가 물려주는 것이 있도록 많이 힘써야 합니다.
첫눈을 맞아 써 내려간 이 글은, 브런치 스토리에 처음 올리는 글입니다. 인터넷에 무언가 검색을 하다 보면 가끔 브런치 스토리라는 플랫폼에 작성된 글들이 눈에 띄곤 했는데, 타 플랫폼과는 다르게 누군가의 진정성이 담긴 목소리가 잘 담긴 글들이 꽤 많다고 생각했기에 언젠가 한번 이곳에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어설프게 써 내려간 지원서였기에 거절당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리 장벽이 높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흔쾌히 OK를 눌러주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나간 시간 속 저의 후손과 같은 미래의 제게 남길 가르침을 적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