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설 연휴다. 쉬는 날이 길어지면 평소 하는 일에 신경을 끌 수 있는 만큼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바깥을 바라보던 눈동자를 안쪽으로 굴려 나의 생각들과 마주하고, 귓구멍을 안쪽으로 열어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런 시간들은 나에겐 식사와도 같은 존재다. 한 끼 정도 굶는다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거나 괴롭진 않지만, 여러 번 거르기 시작하면 몸이던 마음이던 결국 꼬르륵 소리를 내며 경고 신호를 보낸다. 이를 계속 무시하면 에너지가 안팎으로 고갈되어 불안에 휩싸이고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사유의 시간을 가끔이라도 챙기지 못하는 건, 여러모로 끔찍한 일이다.
연휴를 맞아 글을 하나 완성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거의 일주일에 가까운 자유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동안 괜찮은 글 하나 완성하지 못한다면 나 자신에게 크게 실망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다음 글의 주제를 떠올리던 중, 문득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수많은 행동과 취미들 중, 왜 하필 글쓰기에 이렇게 끌릴까? 그래, 이걸 주제로 글을 한번 써봐야겠다. 이런 아이디어들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떠오르곤 한다. 이번 글의 주제는 어젯밤 저녁에 이를 닦으며 떠올렸다. 아니면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지하철 안이었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써온 글들의 출발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평소에 떠오르는 좋은 글감들을 메모장에 아무리 잘 적어 놓아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생기를 잃은 문장만이 남을 뿐 그때 생각했던 글의 구조나 윤곽이 도통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메모는 잘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메모하려 시도는 해보았지만, 그렇게 적어둔 메모 중 글로 이어진 경우는 없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을 바로 실행에 옮길 정도로 매력적이고 내가 진심을 담아 글을 써낼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디어만이 살아남아 글이 된다.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글의 주제를 포함하여 많은 걸 얻는 편이다. 특히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걸 좋아한다. 군대에서 카뮈의 실존주의를 처음 접한 후로, 내가 삶의 부조리에 반항하기 위해 찾은 나름의 방법 중 하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찾는 것이었다. 이주영 감독의 영화 <싱글라이더 (A Single Rider, 2017)>의 엔딩 크레딧에는 고은 시인의 시가 담겨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나는 이 시에서 의미하는 꽃을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보고 싶었다. 그게 나의 반항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어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장 마크 빌레 감독의 <데몰리션 (Demolition, 2015)>에서 주인공은 와이프를 사고로 잃었으나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사이코패스여서가 아니라, 사랑의 소중함에 대해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자신의 삶을 조각조각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했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문득 일상 속 은유metaphor를 발견하게 된다. 전에는 본 적 없었던 것들. 혹은 이미 보았지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들 속에서. "나는 쓰러진 나무다. 아니, 나는 나무를 쓰러트린 폭풍이다." 바쁜 일에 치여 살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일상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고 그것에 귀 기울이자 그는 감정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린다. 아픔이란 무엇이고, 기쁨이란 무엇이었는지. 영화에선 편지를 쓰며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만약 나였다면 이는 흑백의 세상이 세상을 되찾고 내가 가진 심장의 박동과 온기를 비로소 다시 느끼는 경험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의 주제나 좋은 문장에 대한 영감은 음악이나 영화, 좋은 책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산책을 하거나 멍을 때리며 가장 많이 얻는 편이다. 다른 매체를 접해 얻은 정보들이 땔감이 되어준다면, 일상 속에서 얻은 영감은 부싯돌인 셈이다. 특히 출근길에 떠올리는 아이디어들은 정말 좋은 게 많다. 단지 출근하고 나면 전부 잊어버리는 것이 슬플 뿐이다. 작가 한강은 "글 쓰는 사람의 이미지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고요히 책상 앞에 앉은 모습이지만, 사실 저는 걸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걸어간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이지만 실제로도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 걷기를 하루에 두 시간씩 꼭 하신다고 한다. 영화 <오펜하이머 (Oppenheimer, 2023)>에서 아인슈타인과 함께 산책하던 괴델은 나무는 가장 영감을 주는 존재라 말한다. 실제로 한 말인지는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나무로 둘러싸인 길을 걷고 있으면 그만큼이나 맑고 싱그러운 생각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연을 걷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영감의 가치는 결코 간과할 것이 아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 (Paterson, 2016)>에서 주인공은 시를 취미로 쓰는 버스 운전기사다. 영화는 주인공이 겪는 작은 에피소드들로 채워진 일상과 그가 쓴 시를 다룬다. 이 한 문장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정도로 간단한 내용이지만, 영화는 무척이나 정적이고 아름답다. 좋은 일만큼이나 나쁜 일도 일어나지만, 주인공이 일상 속 굴곡을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포용적이다. 그가 쓰는 시는 포용력의 주축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고향을 찾기 위해 주인공의 연고지인 패터슨을 찾아왔다는 일본인 관광객이 등장하는데, 주인공과 관광객은 벤치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며 시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후 관광객은 주인공이 시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때로는 비어있는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법이라며, 공책을 선물로 건넨다. 그리고는 "아하!"라는 의미심장한 감탄사를 남긴 채 길을 떠난다. 일상이라는 공책에 펜을 들어 시를 쓰는 것. 일상 속에 예술이 있으며, 일상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 그걸 아하! 하고 깨닫는 것. 공책을 선물하며 같이 건넨 가능성의 의미를 짐작해 본다.
작가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쓴 뒤 한 인터뷰에서 "어떤 훌륭한 책도 작가가 미리 상징을 염두에 두고 쓴 적이 없다. 나는 진짜 노인과 진짜 소년, 진짜 바다, 그리고 진짜 물고기와 진짜 상어들을 그리려고 애썼다. 만약 내가 그것들을 충실히 제대로 그려 냈다면 그들은 많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떠한 의미나 상징이 핵core이 되어 그 겉에 이야기라는 살이 붙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일상은 곧 이야기가 되며,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시대를 관통하는 울림과 의미를 찾아내곤 한다.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 상자를 열다 보면, 그 안의 선물만큼이나 그 선물을 구매하고 포장하여 건넨 그 마음도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 것과 같다.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에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 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인용해 온 문장이다. 물론 영감이 반드시 평범한 일상에서만 오지는 않겠지만, 그 영감이라는 알맹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무정형無定形의 상태에서 유형有形의 상태로 조형造形해내는 것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할 수 있는 행위 중 사랑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이다.
일상은 소중하다. 슬픈 날은 기쁜 날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게 해 주고, 이를 통해 더 성장할 수 있게 해 주기에 소중하다. 기쁜 날은 슬픈 날을 겪어 보았기에, 자주 찾아오지 않음을 알기에 소중하다. 특별히 슬프거나 기쁘지 않은 하루였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오직 그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하루였기에 소중하다. 내가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은, 누군가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으나 가지지 못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생각 없이 놀며 보낸 나의 한 시간이 만약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기 전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면, 나의 한 시간은 그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무언가를 절실히 가지고 싶으나 가지지 못할 때에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시간도, 하루도, 평범한 일상도 그렇다. 부디 단 하루만이라도 아무 일 없이 편하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삶이 퍽퍽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는 이 사이클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그보다 더 앞서 생각하고 싶었다. 쉽게 말하면,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인 셈이다.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을 때, 나는 글쓰기를 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되물었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써 나의 최종 목표인가? 내가 사는 일상은 글을 쓰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다. 글쓰기는 나에게 명백한 수단으로써 존재한다. 그렇다면 글쓰기라는 수단을 통해 달성하고 싶은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이 시간에 대한 소중함을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아름답게 정돈하고, 가장 보기 좋은 형태로 다듬어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써 세상에 꺼내어 간직하고 싶다. 그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며, 글쓰기를 통해 이루고 싶은 일이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해 머릿속을 정처 없이 떠도는 생각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는 일. 어쩌면 한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했던 나 자신을 그러한 생각들에게 투영하게 되어 더 갸륵히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로써 내가 써낸 글은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자, 치유를 넘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증명이 된다.
글쓰기란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다. 이 문장이 과연 최선일까? 이 문장이 여기에서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이 단어는 이곳에 들어가는 것보다 다른 곳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나에게 되묻고, 또 되묻는다. 이 과정에서 나에게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즐긴다. 시작을 예측할 수 없는 꿈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와 결말에 놀라는 것처럼, 가끔은 글을 씀으로써 글을 쓰기 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답을 얻게 될 때도 있다. 이런 날에는 큰 보람과 뿌듯함을 느낀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나와 대화함으로써, 성장하고 답을 도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글쓰기의 매력에 푹 빠진다. 글쓰기는 섣불리 나의 행동을 판단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친구이며, 힘든 일이나 고민이 있다면 언제나 옆에 있어주는 든든한 파트너이자 퇴고 과정에선 부족한 점을 과감히 짚어주는 스승이다.
글을 씀에 있어서는 항상 솔직해진다. 나의 가장 연약한 면이나, 보여주고 싶지 않은 면도 글로 쓰면 크게 부끄럽지 않다. 글을 쓰면 어디선가 용기가 솟아나기도 하지만, 그만큼 글이 푹신하고 안전한 곳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글 속에 추락한 나는 다시 뛰어오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결말이나 끝을 생각하지 않은 채로 글을 쓰고 있으면 발가벗은 채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유일한 안전장치인 로프는 내가 만들어낸 문장의 완성도만큼 단단할 것이기에 몇 번이고 점검하고 또 점검할 수 있다. 글을 쓸수록 가보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나아가도 괜찮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얻는다. 글을 쓰는 것을 추락으로 인식하기보단, 미지로의 딥 다이브deep dive로 생각하려 한다. 장대건 작가의 장편소설 <급류>에서 등장인물 도담은 소용돌이에 빠지면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을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내가 글을 씀으로써 닿을 수 있는 밑바닥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며, 그곳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글쓰기의 도움을 빌려 닿아보고 싶다.
왜 글을 쓰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왜 쓰지 않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지 못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글을 쓰게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 한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쓴 글을 읽고,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는 사람이 서너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서점에 내가 쓴 책이 진열되어 있고 인세라는 것도 받아보고 싶다. 비록 AI가 글쓰기를 손쉽게 집어삼키겠지만, 10년, 20년이 지나더라도 글쓰기가 의미를 갖는다면 지금의 나에게 선사한 은혜를 언젠가는 훌륭한 글을 통해 갚고 싶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글이 함께해 주길 바란다.